동문오피니언
기 고 /배상만(65회) 인천남부교육청 교육장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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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 3. 4)
70살에 받은 졸업장
/배상만 인천남부교육청 교육장
해마다 찾아오는 졸업 시즌이다. 학교 여기저기에서 졸업을 기뻐하는 환호성이 들린다. 졸업은 인생에 있어 그냥 통과의례로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게 되고 가족과 함께 한 소중한 추억이 될 사진 한 장 만이 남는다.
얼마 전 필자는 아주 특별한 졸업식에 다녀왔다. 식장에 들어섰을 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주름진 얼굴에 순수한 미소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스무명의 할머니들이 필자를 반겨주었다.
그 분들은 지난해부터 우리 교육청과 학습도시 인천시 남구가 협약을 맺고 '사랑의 학교(성인 기초 문해교실)'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는 평균 연령 70살의 학생들이었다.
졸업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이 학교 학생 대표의 낭독이 이어졌다. "앞으로 열심히 배워서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 (중략) … 글을 다 깨쳐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다 풀어놓을 수 있을 때 까지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할머니 학생 대표의 낭독이 또렷이 들려오는 뒷편에서 45년 전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힘든 시집살이 속에 오직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을 사셨다.
그때 당시 필자는 시골에서 갓 올라와 고등학교를 유학하게 되었다. 전화 통화도 어렵던 그 시절 고향 식구들에게 소식을 자주 전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비록 맞춤법이 하나도 맞지 않는 '괴발개발(고양이와 개의 발)'처럼 단순히 의미만 알 수 있는 편지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필자가 유학 간 후 어머니는 힘든 농사일과 집안일을 마친 후 고된 몸을 이끌고 동네야학을 찾으셨다고 한다. 아들에게 편지로 하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임의진 시인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람'이라는 시가 있다.
'마중물'은 우리 어릴 적 펌프질로 물을 길어 먹을 때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뿜어내면, 그 물이 땅 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몰고 왔었다. 그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있다. 이 마중물이 없다면 우리는 가마솥에 밥 지을 물도, 아이들이 씻을 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 졸업식의 주인공들과 필자의 어머니 역시 비록 배움의 열망을 가슴 속에 감추고 살았지만 나라와 가족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진정한 마중물의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그들의 졸업식엔 화려한 꽃다발도 없었고 졸업식을 축하해 줄 부모님도 이 세상에 없지만 그렇다고 누가 쓸쓸한 졸업식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이 70살에 한글을 배우겠다는 열망으로 시작해 작은 졸업장을 들고 눈시울을 붉히는 우리 할머니 졸업생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종이신문 : 20090304일자 1판 14면 게재
인터넷출고 : 2009-03-03 오후 8: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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