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오광철(53회)의 전망차/인천럭비 되살린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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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인천신문(09. 3. 9)
오광철의 전망차
인천럭비 되살린다
뉴질랜드 럭비팀의 영국원정 때이다. 연전연승 전승의 영예를 안고 귀국하리라 여겼으나 마지막 웨일즈와의 경기에서 3대0으로 패했다. 그후 10년이 지났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 뉴질랜드의 병사가 프랑스 전선에서 중상 야전병원에 이송되었다. 그가 옆의 전우에게 말했다. “웨일즈와의 경기 때 내가 트라이했는데 심판이 인정해주지 않았다. 심판을 존중해 수긍했으나 지금이라도 정정했으면 좋겠다.” 그런 후 젊은 병사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웨일즈와의 경기에 출전한 선수였던 것이다. 트라이란 공격 측 플레리어가 득점하는 공격행위를 말한다.
럭비는 타원형의 볼을 상대방의 골에 가져감으로써 득점을 겨루는 경기이다. 길이 27.87~28.5㎝, 무게 314.4g의 볼 패스를 반드시 뒤로 하는 특징이 있다. 볼이 타원형이어서 어디로 갈지 예측불허이다. 그래서 “개구리와 럭비볼은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근대 럭비는 12세기부터 영국 청소년 사이에 성행한 풋볼에서 유래한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각 퍼블릭스쿨마다 특색 있는 경기로 발전했다.
럭비라는 명칭과 경기방식이 정착한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1823년 가을 영국 중부 라그비시의 라그비스쿨 축구경기에서였다. 윌리엄 엘리스군이 볼을 손에 쥔채 달려 반칙을 범했다. 손으로 잡은 볼은 곧 지면에 놓고 발로 차야하는데 급한 김에 볼을 가지고 돌진했던 것이다. 룰위반은 사실이었으나 볼을 쥔 채 몸으로 적진에 돌진하는 감투정신이 주목받았고 이 방식이 도입되었다.
‘럭비 하면 인천이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사실 럭비경기에서 인천의 중고교팀이 전국을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6·25 이전은 인천중학팀이요 50년대 이후는 인천공고팀이었다. 당시 6년제의 인천중학은 수학교사이던 조병화 시인이 지도했었다. 이따금 수업시간에도 학생들과 편갈라 경기를 하는 기행도 보였었다. 그는 일본 동경고사 학생 때 럭비선수였으며 교단에 있으면서도 럭비협회 임원이기도 했었다.
인천시럭비협회가 단계적으로 재정기반을 다지고 전성기 때의 명성을 되찾을 계획이란다.
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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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03-08 17: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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