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절명시(絶命詩)(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09. 6. 3)
절명시(絶命詩)
/조우성의 미추홀
황 매천(梅泉)은 시문에 뛰어난 한말 문장가요, '매천야록' 등 많은 저술을 남긴 역사가였다. 17세 때 순천의 백일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훗날 강화학파의 거두 이건창(李建昌) 등과 스승과 친구 사이로 지냈다.
갑신정변 후 세상의 뜻을 접고 낙향해 만수산 구안실(苟安室)에서 두문불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910년 경술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몇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내 비록 죽을 명분은 없으나 나라를 잃고도 아무도 그를 비통해 하여 죽지 않으니 내가 대신 죽겠노라"며 한밤에 자결하였다.
결행에 앞서 남긴 시 4편을 일러 '절명시'라 하는데 그 세 번째 것은 다음과 같다. "조수애명해악빈(鳥獸哀鳴海岳嚬)/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충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구나/가을의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을 되새기니/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구나"는 내용이다.
오늘 문학 교과서 대부분은 황 매천의 이 시를 수록하고 있는데, 교사들은 이 시를 교수할 때 '지식인의 우국지정'만으로 포장해 매천을 기리지는 않는다. "망국을 한하여 자결한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일지는 모르나, 국가와 민족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에도 눈을 뜨도록 가르치고 있다.
/객원논설위원
종이신문정보 : 20090603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06-02 오후 9:02:40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