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문화칼럼/명분없는 일랑미술관 건립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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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 9.28)
이원규 문화칼럼/소설가
명분없는 일랑미술관 건립
인천예술계는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의 아호를 따서 짓는다는 미술관 문제로 술렁이고 있다. 인천의 모든 미술인들과 예술인들이 안된다고 합심하여 반대하는데 인천시 당국이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정을 알고 보면 모두가 번쩍 정신을 차려야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전말은 이렇다. 인천시는 오랜 숙원이었던 시립미술관을 최고 수준으로 건축하기로 계획하던 중 이종상 화백과 접촉, 그의 작품 전부와 자료들을 기부받는 조건에 합의, 지난 8월말 '일랑미술관'을 짓기로 양해각서를 작성했다. 장소는 송도 석산, 예산은 약 5백억원이라 한다. 이종상 화백은 충남 예산 출생으로 서울대 미대교수를 지냈으며, 광개토대왕과 장보고 등의 영정을 그렸고, 지폐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그려 이름이 알려졌다.
인천시가 사전에 간단한 의견수렴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지난 4월 인천의 미술단체장과 중견미술인들을 모아 간담회를 열고 계획을 밝혔고 즉각 반대에 부딪혔다. 그가 인천과 연고가 없으며 예술성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가 미비하고, 인천이 처음으로 만드는 미술관을 개인미술관으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신중히 논의해 결정하자고 했다. 그런데 인천시는 논의를 생략하고 넉 달 뒤 기습적으로 양해각서를 작성했다. 인천미술계와 문화예술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딴 도시에 빼앗길까 봐 그랬다고 변명하며 반대여론을 지역이기주의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적이 있는 이화백의 벽화가 병인양요를 제재로 한 것이니 인천과 연고가 강한 화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랑미술관을 세우면 지역미술을 명품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강변도 하고 있다.
이 문제를 보면서 필자가 갖는 것은 탄식과 비애이다. 무슨 곡절이 있기에 숨기다가 밀어붙이는지는 따지고 싶지 않다. 이번에도 지역정체성이 우습게 무시되고 있다는 것, 인천시가 문화예술정책을 놓고 또다시 큰 것 한 탕을 노리는 졸속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 문화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이 부족한 정책 담당자들에게 그렇게 중대한 문제를 맡기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필자는 비슷한 탄식과 비애를 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보고 느끼며 칼럼으로 쓴 적이 있다. 서울시향, 부산시향 다음으로 유서가 깊고 예술적 수평이 높았던 인천시향을 놓아두고, 작은 도시의 부천시향, 수원시향이 전국교향악축제에서 극찬받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등 일취월장하고 있는데 내 고장의 인천시향은 내팽개쳐 놓고, 여름에 한 번 아시아 3국 연주가들을 모아 연주를 하고 수십억원의 돈을 퍼붓는 일 말이다. 이번 미술관 일도 그런 '큰 것 한탕주의'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왜 일랑이가. 인천은 함부로 휘둘러도 되는 도시가 아니다. 서울 주변성과 종속성 때문에 언뜻 문화 불모지대처럼 보이지만 연면한 문화예술의 전통을 품고 있는 도시이다. 현재의 시정부가 추구하는 바처럼 명품도시가 되는 길은 내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누가 좋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빌려 입겠다 하는 것은 곤란하다.
김은호, 장발, 고유섭, 조규봉 같은 인천 출신 화가들도 있다. 김은호는 친일 흠결이 있고 조규봉은 월북해 김일성 동상을 조각했으니 어렵다 치고 다른 분들은 누구처럼 작품 1,500점을 받을 수는 없어도 미술관 명칭으로 손색이 없다. 지역 예술인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화백께 정중히 부탁드린다. 인천의 여론에 귀기울여 결정을 거둬들이는 대승적 판단을 해주시기 바란다. 예술가는 자기작품에 대한 긍지가 매우 크지만 스스로 낮추는 가운데 그것이 더욱 빛난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장님과 정책담당자들, 그리고 우리가 뽑은 시의원님들, 국회원님들께 말씀드린다. '일랑미술관' 건립은 수많은 지역예술인들이 지적하듯이 당위성도 없고 명분도 약하다. 혹시 전시공간 하나를 따로 정해 이화백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도 양해각서를 백지화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인천시립미술관으로 명칭을 정하기 바란다.
종이신문정보 : 20090928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09-27 오후 9: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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