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의 미추홀/애경비누(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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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9. 9.21)
조우성의미추홀 /
애경비누
그 옛날 빨래를 할 때는 잿물을 썼다. 짚이나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혼합하여 얻은 알칼리성의 맑은 액체를 세제 대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개항 후 보다 효율이 좋은 잿물을 서양에서 들여왔는데 그를 양잿물이라 했다.
양잿물(수산화나트륨)의 수입은 아낙네들의 가사 노동을 덜게 했지만 신식 빨랫비누를 당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나라의 빨랫비누가 언제부터 수입되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그에 의존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은 1895년경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이다. 일본인 '오다'가 지금의 중구 송월동에 자본금 30만 원으로 차린 합명회사 '애경사(愛敬社)'가 그 효시이다.
여기서 생산된 화장비누와 빨랫비누는 경인지역에 60%, 대전ㆍ대구에 20%, 군산ㆍ목포에 15%, 그외 각지로 5% 정도가 나가는 등 호황을 누렸는데, 주원료인 소지방은 중국 청도·대련과 일본 오쿠라에서 수입했다.
1954년 이 공장을 인수한 채몽인 씨가 자본금 5천만 환으로 '애경유지공업(주)'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회사와 상품명은 소비자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알려진 '애경(愛敬)'을 그대로 사용했다.
'애경'은 곧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1958년 '미향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아 인천과 서울 사이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고, 오늘날의 '애경그룹'으로 성장했다. 최근 장영신 회장이 그 성공비화를 모 일간지에 연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인천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객원논설위원
종이신문정보 : 20090921일자 1판 15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9-09-20 오후 8: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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