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신뢰(信賴)의 원칙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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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0.11.11)
원현린 칼럼/
신뢰(信賴)의 원칙
가령 고속도로를 역주행 한다거나 무단 횡단하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자. 이 때 상대방 운전자에게 결과만을 놓고, 주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하여 과실책임을 물을 수 없을게다.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사망에 이른다 해도 기관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독일에서 판례와 학설을 통해 성립된 ‘신뢰의 원칙’이다. 즉 교통규칙을 준수하는 운전자는 다른 사람도 교통규칙을 준수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으로 족하고 다른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미리 예견하여 조치할 의무는 없다는 법리(法理)다.
교통사고와 관련, 확립된 이론이지만 전 사회생활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내가 남을 믿지 못하면 남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신뢰는 한 번 쌓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 한번 잃은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신뢰도를 보면 인격이 가늠된다. 신뢰정도에 따라 개인적으로는 인격(人格)이 재어지고 회사라면 사격(社格)이 나타난다. 나아가 국가인 경우에는 국격(國格)이 측정된다.
신뢰를 준 곳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배신행위라 한다. ‘배신’하면 떠오르는 것이 “브르터스! 너마져”라고 외친 줄리어스 시저의 외마디 절규다. 배신의 아픔은 믿었던 사람에게 당할 때 더 큰 법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속담이 있다. 최근 어린이를 유아원에 맡겼다가 아이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매를 맞거나 하는 장면이 보도돼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집안에서 가정부한테 혼자 있던 아이가 폭행당하는 모습도 방영됐던 기억이 난다.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다한다. 이러다보니 믿고 바랄 것은 자신뿐이라고 한다.
인간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야하지 그렇지 않고 맺은 인연은 오래가지 못한다. 국가와 국민 간, 회사와 종사자 간에도 마찬가지다. 치자(治者)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아무리 절대 군주라 하더라도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으면 권좌에서 오래 있질 못했다.
종교의 존립이 가능한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게다. 신(神)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하면 그것은 종교가 성립할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종교가 성립된다. 과학적으로 입증해보라고 하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의 힘은 실로 크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이 있다. 설탕을 환자에게 명의(名醫)가 제조한 특효약이라 하고 복용시켰을 경우 놀랍게도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환자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신념의 마력인 것이다.
가정에서도 불화는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가족 간 서로 믿지 못하여 가정이 파탄에 이르기도 하는 예를 우리는 종종 보아오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옆 사람을 그다지 믿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 국민은 ‘사람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28%만이 ‘그렇다’라고 답해 72%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한다. 오늘부터 G20 세계 정상회의가 열린다. 타인 신뢰도는 G20 회원국의 평균보다 낮아 순위로 치면 12위에 그쳤다.
혈연, 학연, 지연이라는 연줄이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면 이웃을 믿지 못하겠다한다. 이웃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뢰사회가 구축 되겠는가. 공정사회는 더욱 요원하다 하겠다.
믿지 못하겠거든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기를 헌 신짝 버리듯 한다. 한자로 믿을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 + 말씀 언(言)이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는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의 구축’이다.
2010년 11월 11일 (목)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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