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원규(65회) 칼럼/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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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1. 1.24)
칼럼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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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위협적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했고 이제서야 대법원이 재심판결을 한 것이다.
선생의 죽음이 억울한 누명에 의한 것임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었는데도 여기까지 오는데 52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로써 이 나라와 국민들은 양심의 큰 매듭 하나를 지은 것이다.
저녁뉴스를 보는 순간 두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첫째는 개인적인 것으로, 내가 왜 무죄선고를 하는 대법원 법정에 가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였던 약산 김원봉과 김산(장지락)의 평전을 쓴 필자로선 마지막 평전의 대상을 죽산 선생으로 잡고 있었다.
약산과 김산처럼 조국에 큰 공헌을 하고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들을 햇빛속에 드러내는 것이 늙은 작가의 책임이라는 생각, 그리고 죽산선생이 내고장 인천이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평전을 쓰려면 현장경험이 매우 소중한데 그것을 놓친 것이다.
죽산선생의 평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3년전이었다. 샅샅이 자료를 찾아 선생의 생애를 복원했다. 선생의 따님을 인터뷰하는 것을 마지막 과제로 잡고 있었는데 기회는 자꾸 늦춰졌고 책 한권을 식은 죽먹기처럼 쉽게 쓰는 어떤 분이 지난해 선생의 평전을 출간했다. 그래서 묵묵히 자료들을 다듬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비로소 국가양심의 수평이 한껏 높아졌다는 생각이었다. 8·15 해방 이후 펼쳐진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의 정치권력자들은 분단 상황을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었고 죽산 선생도 그것에 희생된 것이었다.
당시 정권은 대통령선거에서 불과 216만 표차로 쫓아온 위협적인 정적을 사법살인하는 명분으로 동서냉전과 반공을 이용해 먹은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국민수준도 그런 폭압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한 것자체가 부끄러운 상처를 더 이상 숨기지 말고 파헤치자는 국민적 양심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고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으로 그것은 이제 정점에 이른 셈이다.
최근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피격이 있었음에도 북한과의 대결은 대결이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이렇게 뉘우치고 사과하며 해결한다는 태도, 그것은 자신감과 성숙한 양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다듬어온 죽산 선생의 상세연보는 단행본으로 반권쯤 된다. 눈을 감으면 선생의 생애가 필름처럼 펼쳐진다.
1899년 9월21일 강화군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해서 농업보습학교를 나오고 신문리 잠두교회 청년 신도로서 대부호의 딸이던 경성여고보 여학생 김이옥 소녀를 만난 일, 기미년 3월18일 강화 만세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구속된 일, 감방에서 선각자이던 이가순 선생의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을 갖게 된 일, 일본에 유학해 엿장수로 고학을 하며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눈을 돌리는 과정, 1922년 귀국하여 진보계열의 거두로 떠오른 일, 모스크바 유학, 1925년 전후 최고의 연사, 논객으로 강연회에 청중을 몰고 다닌 일 등.
선생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것은 선생이 61세였던 1959년 2월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생애를 마감한 것은 7월31일이었다.
그해 필자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지역유지 몇 분이 비통한 얼굴을 하고 선친을 찾아와 사랑방에서 울먹이며 탄식을 하셨다. 그분들에게 대문을 열어드린 소년이던 필자는 선생 가실 때보다 나이를 더 먹어버렸다.
때때로 내조국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열패감을 안은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서로 포쏘고 싸우는 것이 여전히 답답하고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이 정도로 국가적 양심을 회복했으니 대명천지에 어깨를 펼만하다.
죽산 선생께서 이제는 편안히 눈을 감으시고 영면하시기를 빌며, 인천지역사회가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기를 기대한다.
2011년 01월 2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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