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당해원(唐解元)을 알고 나서 말하자(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 2.25)
나채훈의 중국산책/
당해원(唐解元)을 알고 나서 말하자
|
|
|
배너 |
15세기 부터 16세기 초반에 중국남부의 대도시 소주에 ‘오중(吳中)의 사재(四才)’라고 이름을 떨친 인물 넷이 출현했는데 그중 당인<자는 백호(伯虎) 말년에 육여(六如)라 했다>은 서화시문(書畵詩文)에 능했으며 특히 미인화(美人畵)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원래 푸줏간(대포집이라고도 전해진다)집 아들로 머리가 좋아 장래성을 내다본 부친이 일찍부터 과거시험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장난꾸러기 행실이 갈수록 심해져 주위에서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다. 그런 당인에게 친한 선배의 따끔한 충고가 있자 마음을 굳게 먹고 공부에 열중하여 20대에 남경에서 실시된 향시(鄕試:지방의 과거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향시의 수석합격자를 해원(解元)이라 일컬었기에 당인이 당해원이라 불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향시 합격자는 이듬해 북경에서 실시되는 중앙의 과거시험에 임하는 것이 관례였고 당인이 이 시험에 합격하리라고 모두들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컨닝 사건이 일어나고 당인은 체포되어 투옥된다.
일설에 의하면, 당인이 북경의 시험에서도 수석합격으로 결정되었는데 이 정보를 알아챈 동향의 도목이라는 사내가 엉뚱한 밀고를 하여 자신은 합격되고 당인은 죄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당인은 평생동안 이 도목이란 자를 혐오했다. 아무튼 치욕을 겪고 낙방한 당인이 상심하여 고향 소주로 돌아왔는데 눈을 흘기며 경원시하는 자도 꽤 있었다. 더구나 그를 이해해주었던 첫부인이 젊은 나이에 죽고, 부유한 상인의 딸로 둘째 부인이 된 여성은 당인에게서 더 기대할 바가 없다며 훌쩍 집을 나가 버렸다.
당인은 상심 끝에 방황했으나 곧 마음을 바로 잡고 자신이 그린 그림과 시문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소주 사람들은 이런 당인에게 차츰 호감을 가졌다. 당시 과거제도를 통한 관료제일주의가 힘쓰던 시대에 일종의 반(反)관료의식이자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상인계층에서 힘있는 관료계층으로 상승하려다가 실패한 사람일지라도 풍류가 넘치고 예술적 능력을 보이면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다는 기백에 대한 예찬이었던 것이다.
당인은 변장하는 취미가 있어 거렁뱅이로 꾸며 부자들을 희롱한다거나 도사로 분장하여 관청에 가서 도교사원에 주는 보조금을 우려내 친구들과 유흥비로 쓰는 걸 즐겼다고도 한다. 마침내 그는 미인 아내를 얻게 되는데 이것 역시 변장으로 일궈낸 작품이었다. 명말(明末) 풍몽룡이 편찬한 단편소설집 <삼언(三言)>의 경세통언 26권에 실린 ‘당해원(唐解元) 인연(姻緣)에 일소(一笑)한 일’에 보면, 어느날 당인은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스쳐가는 배 안에서 굉장한 미녀를 발견하고 한 눈에 반해서 그 뒤를 쫓아갔다. 그녀가 어느 퇴직한 고관의 집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걸 알아내고 당인은 능숙하게 변장하여 가난한 서생으로 행세하며 그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집에 고용인으로 들어가 열심히 근무한 끝에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모양좋게 그 집의 시녀 추향과 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희곡으로 제작되어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당인의 이런 생활방식에 대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당인은 이후 추향과 잘 살았는데 54세에 죽고 만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작품에 이런 말을 했다.
-살아서 이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는 열리게 되는 법. 죽어서 저 세상에 몸을 의탁하는 것 또한 괜찮은 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비슷한 것이니 단지 떠돌다가 타향에 머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권력집단에 들어가려다 경쟁자의 모함에 걸려 죄인이 되고, 출세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낀 후 반(反) 권력. 관료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꿋꿋이 살다간 당인의 정신적 사치(?)를 더듬어 보면 통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권력의 사치나 물질의 사치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해방감이었으리라. 그가 죽은 이후 소주 근처에 있는 양주의 돈많은 상인들이 화가와 문인들을 죽을 때까지 보살피며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뿐더러 서적간행까지 아낌없이 후원했는데 그 배경에는 당인의 이런 모습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 문화예술 지원한다고 생색내려는 관료들이 알아두면 좋을 일이다.
2011년 02월 25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