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권력자에게 붙여줄 쪽지가 있다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 5.13)
나채훈의 중국산책 /
권력자에게 붙여줄 쪽지가 있다
중국의 시골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다원(茶園)이나 다장(茶莊), 다포(茶飽), 다관(茶館)이란 간판을 흔히 보게 된다. 이름은 여러 가지지만 모두 차(茶)를 마시는 곳이다. 이들 찻집 곁에 으레 무성한 고목나무들이 있다. 찻집을 차리고 나서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인지, 아니면 나무가 많은 곳을 골라 찻집을 연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잘 어울려 ‘아하, 이런 분위기에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옛 고사(故事)나 야담(野談)에 비춰가며 전해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노사(老舍)라는 작가가 지은 희곡 가운데 「다관(茶館)」이라는 작품이 있다. 커다란 찻집을 배경으로 청나라 말기에서 50년에 걸친 시대 변천상을 그린 3막(幕)짜리다. 이 희곡의 무대 설명에 보면 ‘막담국사(莫談國事 : 국사를 논하지 말라)’라고 쓴 쪽지가 특별 메뉴처럼 벽에다 붙여 놓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찻집이란 어떤 곳인가? 일찍이 민중들이 맘 편히 찾던 사교장이었다. 몇 푼이면 맛 좋은 명차 한 잔을 맛볼 수 있고, 거의 온종일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리고 따뜻한 엽차 정도는 몇 잔이고 거저 얻어 마실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변잡기에서 세상일까지 두루 섭렵하고 떠드는 곳이 되기 마련. 그런데 그곳에 ‘국사를 논하지 말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니. 이유가 있었다.
희곡의 제1막은 1898년.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지 2년 후, 이번에는 의화단사건이 일어나 외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중국인들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남긴 시기다. 개혁주의자 강유위가 ‘과분두부(瓜分豆剖)’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던 그 무렵이다. ‘과분(瓜分)’의 유래는 <전국책 33권 유향편>에 ‘조나라가 망함에 편승해서 이를 과분한다’에서 비롯되었지만 한 나라가 망하게 되면 열강들이 기회를 틈타 그 영토를 나누어 갖는다는 걸 뜻한다.
‘두부(豆剖)’는 콩의 꼬투리가 갈라져 콩이 흐트러지는 상태. 따라서 ‘과분두부’는 그런 위험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전개된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멸망 직전의 조국―이런 시기에 찻집에 모인 사람들이 국사에 대해 말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하여 목소리가 높아지기 쉽고 자칫 멱살잡이나 주먹질이 오갈 것을 염려한 찻집 주인의 배려였다.
하지만 찻집 주인의 속셈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싸움이 벌어져 찻잔이 박살나고 탁자가 엎어지는 소동이 일어나면 지역의 어른이나 순경을 불러다가 화해를 시키는데 이때 다관에서 파는 가락국수를 놓고 화해의 악수를 했으므로 찻값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더하여 깨진 찻잔이나 부서진 탁자는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에서 시가보다 더 비싸게 쳐 받아낼 수 있었다. 이때는 평소에 가족들이 실수해서 깨트린 찻잔 조각을 구석에다 잘 챙겨 두었다가 이 값까지 소란 대문에 깨진 것으로 쳐서 값을 받았다. 노사는 이런 일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도 우국(憂國)의 민중을 보여주어 웃음 속에 진한 눈물을 담아내고 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농협의 전산망 사건, 부산저축은행 그룹의 비리와 부실 등 금융 막장을 보면서도 국민의 땀과 눈물이 녹아있지 않은 정치인들의 수사나 수사당국의 발표를 보면서 문득 희망을 잃은 민중들의 ‘다관이야기’가 떠오른다. 은행이 서민들의 예금을 분탕질하고 강도 사기나 다름없는 일을 벌였는데 ‘감사(監事)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 은행을 부실에 빠뜨린 중대 원인’이라는 참으로 넉넉한(?) 그 발표문을 대서특필하는 언론까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공기업의 감사들에게 ‘자신있게 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보자. 몇 명이 나설지 궁금할 국민이 있을까. 대한민국 감사들 때문에 공기업이 부실한가? 누가 그들에게 감사 자리를 만들어 주었는가? 이걸 몰랐다면 정말 한심한 정치이고, 알면서 쉬쉬했다면 퇴출되어야 할 우선 대상이 정치 아닌가. 그런데도 여야 똑같이 내년 총선에서 득표를 겨냥한 자가 발전에 급급하다.
-막담국사(莫談國事), 노사의 희곡에 나오는 그 쪽지를 한 1백장 쯤 인쇄해서 이 나라 100인 권력자 사무실 벽에 붙여 놓으면 ‘참 좋을 텐데, 정말 좋을 텐데 마땅한 방법이 없구….
2011년 05월 13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