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개항(開港)(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 5.13)
개항(開港)
/725회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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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개항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기함 서스케하나 호 등 군함 7척을 이끌고 지금의 요코하마 시 앞바다에 나타나 조약체결을 강요해 결국 그해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그 21년 후인 1875년, 일본은 미국에 당한 수법을 그대로 답습해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 해상에 불법 침투시켰고, 해안 방어를 맡고 있던 수군이 방어적 공격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함포 사격을 해댔다.
이어 일본군은 영종진에 상륙해 살육과 방화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대포, 군기, 병서 등을 약탈하고 물러간 후 적반하장으로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운운하면서 1876년 2월26일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제했었다.
인천 개항은 그 조약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일본 개항과는 양상이 달랐다. 준비 작업 등이 전적으로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방적, 피동적, 강압적인 개항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싫든 좋든 조선이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변방에 속하게 된 전환점이자 신문물을 접하게 된 개화의 출발점이기는 했지만, 훗날의 식민 예속화는 물론 6·25전쟁의 단초가 됐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근대화에 대한 자발성을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겼다는 점도 안타깝다. 그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적 '기억'인 것이다. 수년 전, 시민적 합의로써 '인천개항 100주년기념탑'을 철거한 것도 '기억'과 '기념'의 다름을 인식한 때문이다. 관광 차원에서 개항장을 널리 알리는 일과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05월 1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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