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인천의원들(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 5.11)
인천의원들
/24호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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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인 1946년 12월 미군정은 군정 최고 자문기구로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했던 적이 있다. 군정하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하곡수집법, 미성년자 보호법, 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특례법 등을 제정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대의정치 사상 최초의 의회였지만 제헌국회 선거 직후인 1948년 5월 19일 해산했다. 90명의 의원 중 관선과 민선이 각각 반수였는데, 그 중 15명이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계승했다.
인천에선 양제박, 하상훈 의원이 선출됐다. 양제박 의원은 무역업을 하다가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투신했고, 하상훈 의원은 객주 부조합장, 동아일보 지국장, 신간회 지회장 등을 역임한 후 정계에 나왔다.
1948년 5월 10일에 실시한 제헌국회 선거에서는 갑구의 곽상훈 후보과 을구의 조봉암 후보가 2만6천907표와 1만7천620표를 얻어 당선했다. 인천 출신의 정치인들이 중앙무대에 진출해 활동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제하에 조선소년군 지대장 등으로 활약했던 곽상훈 의원은 후에 국회 전원 의원장, 국회부의장, 민의원 의장을 역임했고, 독립운동가 조봉암 의원은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진보당 창당 등을 주도했었다.
그 뒤를 이어 6선의 김은하 의원과 4선의 이윤성 의원이 국회 부의장에 올라 활동하여 인천 정치인의 위상을 높여 왔고, 최근엔 4선의 황우여 의원이 원내 대표로 선출돼 다각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인천의 정치력 부재를 잊게 해 준 쾌사였다. 집권당의 2인자로서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05월 1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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