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돌반지(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 6.10)
돌반지
/조우성의미추홀( 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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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발행된 잡지 '서우' 제4호에는 박성흠의 '아한의 광산개요(我韓의 鑛産槪要)'라는 글이 실려 있다. 광물은 부의 근원인데, 금·동·철에 불과하고, 그 중에는 금과 사금이 국내 전체 수익의 97%에 달한다고 했다.
그 무렵 전국의 금 산지는 136개소로 연간 620여 근을 산출했는데 가장 큰 금광(金鑛)은 운산(雲山)이고, 그 다음이 은산(殷山)이었다. 경기·인천은 산금이 가장 적은 지역이었다. 광주(廣州), 안성(安城) 2개소뿐이었다.
반면에 사금(砂金) 산지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평안도가 역시 가장 많아 전국 총 생산량의 3할을 생산해 냈다. 경기·인천은 사금의 생산량도 가장 적었는데, 안성(安城), 죽산(竹山), 영종(永宗) 등이 산지였다.
1919년에 들어와 영종에서 김성근이 처음 금광맥을 발견해 큰돈을 벌었고, 사회 기부가인 김종현, 김달현 형제도 금광으로 거부가 되었다. 금광은 여러 곳이었지만 동광리가 처음이었다고 해서 그곳을 '금골'이라 불렀다.
1933년에는 강화(江華)에도 황금바람이 불어 닥쳤다. '한참 소문 날리던 영종도 못지않는' 사금 매장량이 있다며 각처의 황금광(黃金狂)들이 모여들어 도 광산과에 출원한 광구만 43개 처에 달하는 등 광풍(狂風)이 일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한때의 골드러시에 불과했다. 1985년에도 한라광업이 영종동 운북 3리에서 사금을 채취한 적이 있으나 그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금(金)'과는 인연 없이 살던 판이었는데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마침내 1g짜리 돌 반지까지 등장했다는 보도다. 황금을 돌같이 보랬지만 왠지 허전해 뵈는 1g이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06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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