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사치가 문명 발전의 견인차일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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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1.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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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채훈의 중국산책/
사치가 문명 발전의 견인차일까
프랑스 경제학자 장 카스타레드는 『사치와 문명』에서 ‘사치는 욕망이 아닌 요구’이며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장신구의 발전이 인류 문명을 견인’했다고 주장하여 화제다. 사치는 악덕(惡德)의 하나로 인색해온 사람들에게 꽤나 의아스런 견해이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그는 “사치가 유용성(有用性)에서 앞서고 인간적이며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이다”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풍속소설 『금병매』나 『홍루몽』을 보면 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런 견해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이 있다.
- 머리에는 진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금등롱(金燈籠) 귀걸이를 너울거리며 겉옷 아래에 있는 붉은 명주 바지에 수놓은 무릎 바대와 넓은 소매자락 안에는 향다목서환(香茶木犀丸 : 향기나는 차와 물푸레나무로 만든 구슬)을 넣어 서너 가지나 되는 향기를 몸에서 풍기고 있었다<금병매 제23회>. 이런 치장을 한 송혜련은 바람둥이 서문경과의 관계가 드러나 자살하는 여인이다. 한마디로 불륜을 생의 에너지로 삼은 사치녀를 비웃은 것이다.
- 금실로 짠 진주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장을 곁들인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섯 마리의 봉황이 각각 입에 진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한 갈래 지은 비녀를 꽂았다. 목에는 웅크리고 앉은 교룡(蛟龍)과 합쳐 만든 진주 장식의 순금 목걸이를 하고, 치마에는 넙치 모양으로 새긴 장미 색깔 옥(玉)을 반대 색깔인 녹색실로 꼬아 달고 있다. 그리고 모피를 안감으로 대고 금색실로 모양을 내 옅은 회청색의 예복을 걸쳐 입었으며 밑에는 꽃을 흩뿌린 도안으로 보드라운 비취색 바탕의 쪼글쪼글한 비단치마를 입었다<홍루몽 제3회>. 부유한 귀족의 안방마님이 화려한 액세서리와 의상을 갖춘 모습이다. 물론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은 이 소설에서 공간 사치, 음식 사치에 곁들여 섬세한 미적(美的) 세계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런 모습의 밑바닥에 병들어 있는 사회지도층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아무튼 다양한 사치가 역사와 함께 지속되어 온 점은 분명한데 사치향락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수양제의 경우를 보면 또 다른 진면을 엿볼 수 있다. 수양제는 북쪽의 황하에서 남쪽 양쯔강까지 수천 리에 달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자 초호화판 용주선을 띄우고 유람에 나섰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 배는 높이가 약 14m(45尺), 길이가 600m(200丈)인데 4층으로 지어져 마치 이동하는 궁궐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맨 윗층은 황제가 사용하는 전각과 개인용 방이 꾸며졌고, 2층에는 골라 뽑은 후궁들의 방 120개가 있었다. 이런 대규모의 호사스런 시설로 그친 것도 아니었다. 기발하기 이를 데 없는 장치를 고안하여 설치한 낙양의 황제 전용 서재인 관문전의 경우가 좋은 예다.
궁중도서관에 있는 3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일일이 점검하여 약 3만7천여 권의 주요 서적을 골라내어 그곳에 보관하고 그 가운데 귀중본 50권은 필사본을 여럿 만들어 분산 보관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관문전의 바깥 출입문에 비밀 누름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발로 밟으면 문이 열리면서 위쪽에서 신선같은 인형이 슬며시 내려와 문 안쪽의 장막을 걷어 올리면서 황제를 안으로 인도했다. 독서를 마치고 나서 밖으로 나와 다시 누름장치를 밟으면 원래대로 장막이 쳐지고 문이 닫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요즘에야 이런 정도는 별 것 아닐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수양제의 이런 향락적 사치는 철두철미 현세적 만족과 집착에 탐닉한 결과물인데 대운하의 경우, 이후에 중국의 남북교통로 요충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효용가치로 문명 발전의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현실의 한정된 틀을 깨뜨린 막대한 낭비 과정에서 예상할 수 없었던 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의 고통 받았을 민중들을 생각하면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을 지울 수 없겠으나 현실은 그렇다는 말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관음전에 비밀리에 보관되었던 귀중한 서적 8천여 권은 당나라가 성립하고 나서 장안으로 옮기기 위해 배편으로 수송되었는데 도중 갑자기 일어난 광풍이 배를 덮쳐 한 권의 서적도 구하지 못하고 황하에 수장되었다. 수양제의 유일한 격조있는 사치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2011년 06월 17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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