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가슴 뭉쿨한 삶의 이야기
작성자 : 김연욱
작성일 : 2011.06.26 05:32
조회수 : 1,294
본문
지퍼가 고장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영어 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허드랫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하얗게 분필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나는 결코 움추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잠바를 한 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우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 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져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차디찬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도시락 밥을 더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께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 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 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가족 셋은 오랫만에 함게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드시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흰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이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돠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못한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렸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뚝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희 나를 깨워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
위의 글은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 글입니다.
그 후 그 학생은 우수한 서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미국에서 모시고
같이 공부하면서 보살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생은 참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이겨 나가는 자만이
차지하는 영광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영어 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허드랫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하얗게 분필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나는 결코 움추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잠바를 한 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우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 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져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차디찬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도시락 밥을 더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께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 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 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가족 셋은 오랫만에 함게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드시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흰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이 고운 분이다.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돠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못한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 몸이 아팠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렸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뚝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희 나를 깨워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
위의 글은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 글입니다.
그 후 그 학생은 우수한 서적으로 공부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형을 미국에서 모시고
같이 공부하면서 보살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생은 참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이겨 나가는 자만이
차지하는 영광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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