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월미도 조탕(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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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굿모닝 인천(2011. 7월호)
월미도 조탕
/ 글 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해수풀장으로
전국 최고 유원지 명성
어디서 온 섬일까. 언제, 어디서 우리 곁으로 떠내려 왔는지 모르는 작은 섬, ‘달 꼬리 섬’ 월미도(月尾島). 그러나 정상에 올라 굽어보아도 앞쪽 응봉산에서 건너다보아도 생김새가 ‘달 꼬리처럼 길게 휘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소월미도를 꼬리처럼 길게 달고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을 달의 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1659년, 조선 숙종 때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월미도’를 ‘어을미도(於乙味島)’라 이른 대목을 보아도 그 같은 이야기가 허구임을 짐작케 한다. 그 후 ‘어을미도’가 ‘월미도’로 축약돼 불리고, ‘대동여지도’ 등에 ‘행궁(行宮)’과 함께 ‘월미(月尾)’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과연, ‘어을미도’는 무슨 뜻일까? “우리말을 한자의 소리만 빌어 나타낸 것이며, ‘어을(於乙)’은 곧 우리말 ‘얼’이다. ‘얼’은 ‘섞이다’ 혹은 ‘사귀다’는 뜻이다. ‘미’는 한자로 여러 가지 글자로 쓰지만, ‘물[水]’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석하면, ‘월미도’는 ‘물이 섞이는 섬’ 정도의 뜻이 된다.”
월미도 조탕에 걸렸던 범랑으로 만든 간판
전국에 이름 떨친 임해유원지
믿기 어렵지만, 그 옛날의 제물포는 ‘극동의 나폴리’라고 불릴 만한 미항이었다. 1888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세계적인 여행가인 샤를르 바라는 자신의 기행문에서 제물포의 풍광을 이렇게 전했다.
“다음날 아침,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물포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제물포의 주요 경승인 월미도 역시 샤를르 바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철도국은 1920년 경인선에 임시 ‘화열차(花列車)’를 운행했다. 이는 월미도 벚꽃의 유명세를 이용해 철도 수입을 올리려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향락객들을 나룻배로 실어 나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육지와 월미도를 잇는 둑길이었다. 둑길은 1922년에 완공되었다. 철도국은 둑길 완공과 더불어 월미도를 국내 최대의 임해 유원지로 만들어 나갔다. 야외 캠핑장, 해수욕장, 식물원, 운동장, 사슴 사육장 같은 위락 시설과 함께 해수 풀장과 조탕(潮湯)을 개장했다.
월미도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해수풀장과 바닷물을 데운 공동 목욕탕인 조탕이 신설되면서부터이다. 봄에는 벚꽃놀이, 여름에는 해수욕, 그리고 겨울철에는 따듯한 건강욕을 즐길 수 있어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최고의 유원지로 등극했다. 그 무렵 조선팔도 백성들의 소박한 꿈은 단 하루라도 월미도에 가 호사를 누리는 것이었다. 월미도가 점차 명성을 얻어가자 1923년에는 임해학교(臨海學校)가 세워지고, 그 이듬해 에는 자동전화를 설치했다. 봄철이 되면 인천사진구락부의 촬영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또 비행사 장덕창(張德昌)이 수상 비행기를 몰고 와 소월미도 해상에 내려앉아 전국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 후 철도청은 조탕 시설을 민간에게 불하했다. 민간업체는 풀장을 크게 증설하고, 만조가 되면 물에 떠 있는 듯이 보이도록 설계를 한 용궁각(龍宮閣)이라는 요정도 문을 열었다. 용궁각에서는 내로라하는 인천권번(仁川券番·인천 기생들의 조합) 소속 기생들이 춤과 노래를 공연해 전국의 한량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1935년 무렵에는 목조 2층짜리 ‘빈(濱)’ 호텔까지 생겨 이름을 날렸다.
월미도의 번영은 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에 들어가자 월미도는 다시 먹구름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광복을 거쳐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는 비운을 다시금 겪게 된다. 전후 남은 것이라고는 야외 해수풀장 하나뿐이었다.
군사 기지에서 ‘문화의 거리’로
1953년 여름,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막을 내렸지만, 월미도는 숙명처럼 다시금 군사 기지가 되었다. 미군의 콘세트 막사 등이 들어서고 부두에는 밤새 귀한 전등불이 환히 밝혀진 별천지였지만, 금단의 고도(孤島)였다.
월미도가 군사 기지에서 시민의 휴식처로 탈바꿈한 것은 1989년이었다. 해안가를 ‘문화의 거리’라 명명하고, 국내 최초의 식당 관광유람선 ‘코스모스’호가 취항했다.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 각종 조각상, 대형 닻과 친수 계단, 야외무대 등을 설치했으며 특히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관광명소로 인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월미도의 옛 모습은 오늘 되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수려한 유원지의 경관은 모두 오랜 사진엽서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이 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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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역사, 별난 물건 시리즈에 게재된 조탕 관련 물건 및 사진은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엔 희귀한 근대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문의 76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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