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송곳을 든 자가 과연 이겼는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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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1. 7. 1)
나채훈의 중국산책 /
송곳을 든 자가 과연 이겼는가?
노동자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발적 연대로 주목을 받는 ‘희망의 버스’가 지난 달 11일 1차 16대였는데 이달 9일에는 185대로 늘어나 부산으로 향한다고 한다. 참가자 중에는 저명인사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 평범한 서민이라는 데서 우리의 민심(民心)을 읽는다. 그리고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희망’이란 데서 감탄한다. 희망은 반드시 낙관이 밝히는 불빛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어떤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난다. 아니 인간의 삶이 절망과 비관의 땅에 사그라지듯 묻힐 수 없기에 절망을 거부하고 어두운 오늘을 넘어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그 의지만으로도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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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를 반증한다. 흔히들 역사를 들먹일 때 ‘영웅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를 말하면서 역사란 영웅이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민중이 쌓아가는 것인가를 두고 갈등한다. 화이사서(華夷士庶)라고 했던가. 여기서 ‘화(華)’는 분명 중화(中華)를 가리킨다. ‘이(夷)’는 변방의 오랑캐다. ‘사(士)’는 기득권을 누리는 지배계층이고, ‘서(庶)’는 지배받는 평범한 서민들이다. 따라서 화사(華士)는 역사의 중심이 중국이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영웅이라는 것인데 반해 이서(夷庶)는 그 중심이 변방이고 민중이 역사를 쌓아간다는 주장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양단하여 볼 일이 결코 아니다. 변방이 존재하기에 중심이 있고, 민중이 있기에 영웅이 길러진다. 영웅을 기른 민중은 다시 그 영웅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의 삶을 살아간다. 이리하여 역사에서 보면 승리자같은 패배자가 생기고, 패배자같은 승리자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근대화의 새벽을 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용맹하게 의병을 이끌었던 이수성(李秀成)은 남경 함락 직전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다. 난을 일으켜 14년 동안 청나라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니 몹시 미운 털이 박혔을 터. 그가 토벌군 대장 증국전에게 끌려갔을 때 승리자는 송곳을 손에 들고 무수히 그의 몸을 찔러댔다.
― 피가 마치 물 쏟아지듯 했다. 고 증국전 자신이 당당한 필치로 기록에 남겼다.
송곳을 든 자가 승자였던가?’ 하는 의문 부호는 오늘날 이미 판정이 내려진 상태다. 중국의 근대화를 붉은 피로 일깨운 이수성은 추모의 반열에 올랐다. 바꾸어 말하면 송곳을 들었던 증국전은 역사의 패자였던 것이다.
‘희망의 버스’는 민심이란 힘으로 송곳을 들고 있는 부산의 한 조선소를 방문하고자 떠나려 한다. 거대 재벌이 이익만 추구하다가 최소한의 정당성 없이 노동자를 해고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사실 우리 모두가 지키는 법과 제도를 가진 자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고 따라서 실력과 노력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있었다면 그 버스는 떠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서 분노하는 사람에게 이성과 논리로 효율을 강조하고 실용으로 설득한다고 해서 마음이 풀릴 수 있을까. 또 친서민 정책을 펼친다고 수없이 반복하면서 환율과 금리, 감세로 수출 위주의 대기업에 혜택을 몰아줘 서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성장의 과실을 덜어낸 것이 누구인가.
‘희망의 버스’에 승차하려는 민심은 분명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라는 이름의 송곳에 찔리는 현실이다. 우리는 미래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는 대학생, ‘한진중공업이 179명을 대량 해고한 직후 주주들에게 174억 원을 배당했다. 그리고 최근 10년 간 4천277억 원의 이익을 냈는데…’ 하며 노동자에게 비용 전가를 능사로 한다고 울분을 터뜨리는 노동운동가, ‘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절박한 몸짓을 끝내 외면하고 크레인 위로 고공 절벽으로 노동자를 내모는 거대 기업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다’는 시인, ‘아이들에게 더 이상 절망적인 현실을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라는 어느 교사,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폐기처분하는 것이 사람일 수 있는가? 무자비한 자본의 논리다’고 규탄하는 장애인의 목소리가 절절하다. 지금 우리는 ‘부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이 땅의 재벌기업은 어찌하여 정리해고라는 송곳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다.
나채훈(중국역사문화연구소장)
2011년 07월 01일 (금)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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