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펄펄 나는'龍'… 인천 그'龍'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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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1. 7.15)
"펄펄 나는'龍'… 인천 그'龍'을 타라"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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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비하는 중국을 상징하는 상하이 푸둥 높이 468m 동방명주. 한중수교 19주년을 맞아 인천과 중국의 새로운'황해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
2011년은 신해혁명 100주년, 중국공산당 창당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람들은 신중국 건국을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만천하에 고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중국혁명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아편전쟁은 국가의 토대와 민족적 자긍심을 무너뜨렸고, 민중들에게는 생활의 기반이 와해되는 쓰라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패배의 순간은 중국 민중들을 섬광 같은 자각으로 일깨웠고, 이처럼 쓰라린 자각이 밑바탕이 되어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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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1911)에서 5·4운동(1919)으로 이어진 신문화운동은 1921년 7월 상해에서 13명의 선각자들이 모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갖은 고초와 탄압 속에서도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운 것처럼 번져 마침내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만천하에 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편전쟁의 패배로부터 107년, 신해혁명 28년 만에 이룩한 중국의 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지배세력의 눈에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던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이 세운 새로운 나라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애국지사가 목숨을 잃었고,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들 중에도 권력과 돈 앞에 나라를 버렸던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모택동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던 사람들 중에 천안문 광장에 설 수 있었던 사람은 동필무(董必武), 이달(李達)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비명에 죽거나 변절하고 말았다.
중국은 건국 이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문화대혁명 등 몇 차례의 실정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덕분에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섰고, 1994년에는 동방명주(東方明珠) 타워를 상해에 세웠고, 마침내 2010년 상해세박회(世博會)를 통해 세계의 중심이란 자부심으로 동방지관(東方之冠)을 세웠다.
그러나 올해는 무엇보다 북중우호협력조약이 체결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남북관계가 경직되면서 더욱 가까워진 북중관계는 금년 들어 압록강 황금평이 북중합작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동해 나진항에 3개의 부두가 건설되면서 앞으로는 동해가 중국의 내항이 되는 단초가 열렸다. 대국굴기( )하는 중국의 부상 앞에 남북통일은커녕 더욱 멀어져만 가고 있는 남북의 무게가 더욱 막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2011년 07월 1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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