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굴곡의 역사 따라 달린 경인철도(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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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굿모닝 인천(2011/ 9)
굴곡의 역사 따라
달린 경인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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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정기승차권 제66주년 철도의날 ‘경인복선개통’
기차는 문명개화의 상징이었다. 기차 모형을 갖고 귀국한 주미 대리공사 이하영이 고종황제에게 철도의 효용성을 역설한 이래, 조정은 철도 부설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그에 미치지 못하자 부설권을 미국인 모오스에게 이양했다.
1899년 3월 22일. 이날은 우리나라 철도사의 막을 연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오전 9시. 인천부 우각리 야트막한 언덕배기에는 조정의 관리들과 인천 주재 각국 외교관, 경제인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미국인 모오스(Jamws R. Morse).
공사 총감독 콜브란, 한국개발공사의 타운센드 등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모오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뭔가 채 풀리지 않은 봄 날씨 같은 서늘함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일본을 따돌리고 어렵사리 얻은 부설권이었지만, 미국에서의 자금 모집이 저조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리라.
모오스는 결국 자금 조달에 실패하고, 1898년 12월 호시탐탐 경인선 장악을 노리고 있던 일본인에게 부설권을 되넘겨 주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어 나머지 공사를 속행했다.
철도신호등 2등 객차
경인철도합자회사는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열심히 공사한 결과 같은해 9월 18일 인천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고, 인천~노량진 32.2㎞의 노선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경인선 개통 소식을 1899년 9월 19일자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어저께 개업 예식을 거행했는데, 인천서 화륜거(火輪車·기차의 별칭)가 떠나 영등포로 와서 경성의 내외국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서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에서 연기는 반공에 솟아올랐다.”
따라서 일부에서 경인선 개통식을 노량진에서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날 서울과 인천의 빈객들은 노량진에 간일조차 없었으니 현재 노량진역 구내에 한국 철도 시발지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 오류인 셈이다. 그 주체야 어떻든, 비를 인천역으로 옮겨 영욕이 점철된 우리 철도사를 후세에게 바르게 알려 줄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경인선은 개통 당시 33.2㎞(인천역~노량진역) 구간을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1일 2왕복, 1시간 30분에 달렸다. 초보적 수준이었으나 일제가 대륙 침탈 야욕의 하나를 실현한 것으로 그들이 해외에서 경영한 최초의 철도로도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경인선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홍보 부족과 비싼 요금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인천서 서울로 가자면, 기선이나 돛단배 혹은 말이나 가마를 이용했던 것이다. 또한 배일 감정으로 열차 운행에도 지장이 많았다.
경영난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월미도유원지 개발 이후였다. 월미도가 조탕, 해수 풀장, 벚꽃놀이 등으로 명성을 얻자 봄철에는 화열차(花列車)까지 편성해 전국의 관광객을 유치했고, 직행 열차까지 운영해 경향의 여객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경인선은 단순한 여객만 수송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 침탈 도구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 35년 동안 경인선은 그렇게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오가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은 우리가 비로소 우리의 힘으로 철도사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사상 초유의 극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전후 피나는 노력으로 1959년 8월 사상 처음 객차 제작에 성공하였다. 경인선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증기기관차~디젤기관차~기동차~전철로 이어지면서 차량이 개선되었다.
1960년대에 복선화, 1970년대에 전철화 사업이 완료돼 대기오염 방지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복복선 사업이 마무리되자 경인선은 연간 승하차 인원 1억여 명, 수송화물 3천만 톤에 이르는 국내 유일의 흑자 노선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침체 일로를 걷기 시작해 지옥철(地獄鐵), 지각철(遲刻鐵)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서울서 부산까지 2시간 18분에 달리는 시대에 정부가 철도 시발지로서의 권리와 철도 발전의 헌신을 잊은 채 인천사람들이 서울까지 가는 데 1시간 10분이나 허비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새로운 세기를 달리기 위해서는 경인선의 혁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라는 명성과는 달리 경인선에는 기존의 복복선을 활용한 초특급 운행, 열차 시설의 획기적 개선, 제물포, 동인천역 등 잘못 붙여진 역명의 개정, 문화공간으로서의 역사(驛舍) 운용 개선 등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별난 역사, 별난 물건 시리즈에 게재된 경인선 관련 물건 및 사진은 중구 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근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엔 희귀한 근대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문의 76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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