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문화원(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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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1. 8.26)
문화원
/( 578 )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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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원의 모태는 1950년대에 발족한 주한 미국 공보원(USIS)이었다. 인천의 경우, 1953년 4월1일 '인천 한미문화원'으로 창립했는데, 관장은 이경성 박물관장이 겸임했다.
당시 인천시장과 주한 미국공보원 대표와의 합의로 발족한 '인천 한미문화원'은 인천시립박물관 안에 사무실을 두고, 영화부, 미술부, 음악부, 도서부, 사진부, 문화강좌부 등 여러 부서를 두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문화원 직원들이 손수 무거운 영사기를 메고 동네를 찾아다니며 '영화의 밤'을 열어 최신의 해외소식과 세상 견문을 넓혀주었던 일, 한 달에 한번씩 무료로 나눠 주던 '자유의 벗'과 컬러가 선명한 '달력' 등이 기억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인식 부족으로 문화원 종사자들의 고생은 컸다. 이를 보다 못한 김정렬 시장이 1956년 10월 운영난을 타개하고자 각계 인사 22명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름도 '인천문화원'으로 개명했다.
특기할 일은 1957년 우문국 관장이 '한국문화원연합회'의 결성을 발기하여 서울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총회 석상에서 부회장에 피선됐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인천의 선대에 의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를 가진 인천의 '문화원'이지만, 사업 환경은 오늘도 열악하기만 하다. 필자가 '남동구20년사' 편찬을 맡아 1년여 간 편찬사무실이 있던 '남동문화원'으로 출근한 일이 있는데, 직원들의 열정과 헌신에 비해 사업 환경이나 처우는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지역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문이라고 생각한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08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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