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기고/죽산 평화통일 정신 인천이 이어나가자(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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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평화통일 정신 인천이 이어나가자
■ 기고 /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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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에서 일 년 가까이 매주 한 면을 할애해 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경륜을 두루 살폈던 것은 <인천일보>라는 사명에 걸맞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1959년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법살된 날로 계산해보면 어느덧 52년 전의 일입니다. 세월이 무심한 탓에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활이 힘들다보니 이 엄청난 사건이 어느덧 잊히거나 잘 모르는 세대가 늘어가고 있는 때에 진실을 알려준 공로가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젊은 김칭우 기자가 이를 밝히고 정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인천의 밝은 앞날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1899년 인천에는 세 사람의 걸출한 지도자가 탄생합니다. 장면 총리,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 그리고 조봉암 선생이 그들입니다. 한 분은 교육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나머지 두 분은 정치적 선각자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들과 사상은 달랐지만 1905년에 태어난 이승엽 같은 이도 북한에서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행한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인천의 정치적·사상적 개척자들은 거의 시운(時運)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장면 선생은 4·19학생의거로 탄생한 민주정부의 내각수반이었지만 5·16쿠데타에 의해 실각해 깔멜수도원의 수녀들 치마폭에 숨었다는 모략을 받아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말았습니다. 군사반란 얼마 전 젊은 군인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미국이 있고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느냐며 모든 것을 일소에 부쳤던 안이한 실책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너무 믿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엽은 6·25 당시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북한 정부의 고위직에 올랐으나 전후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합니다. 비록 그의 사상과 이념에 공감할 순 없더라도 인천의 후학들은 훗날 평화통일이 되면 당시 북한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진실을 따지고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외세에 의한 분단이란 비극에 더해 민족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자멸의 길로 향하던 민족상잔의 고통 속에서도 평화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명(命)과 생(生)을 걸고 불행한 국운(國運)에 맞서겠다는 자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금년 1월 20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대법관 전원일치 판결로 국가변란죄 무죄, 간첩죄 무죄, 불법무기 소지죄에 대한 선고유예가 결정되었을 때 판결문을 읽는 대법원장의 목소리도 격앙되게 들렸습니다. 법정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 자리에서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 가슴속에는 할 말이 많았을 텐데도 그 순간에는 오직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과거 죽산 선생과 함께 진보당 활동을 했던 이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팔십이 넘은 선생의 따님 조호정 여사와 아들, 친척 그리고 몇몇 관심 있는 이들과 기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정한 세월이 반백년이나 흘렀던 것입니다.
옛일을 간략히 회고해보면 해방 후 혼란한 정국에서 조선공산당을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죽산 선생은 공산당과 결별하고 인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됩니다. 농림부 장관 시절 죽산 조봉암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토대로 토지개혁을 실시해 한반도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농민들이 자기 농토를 가질 수 있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관에서 물러난 후 두 번에 걸쳐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절충과 타협의 슬기를 발휘해 의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제일 정적은 국회의장이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으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5일 앞두고 해공이 서거하자 그 지지의 일부가 죽산 선생에게 쏠리며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지지를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것이 조봉암 선생의 죄라면 죄였습니다. 진보당의 정강정책 전문(前文)에는 6·25전란을 일으킨 김일성은 사죄해야 한다는 명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당이 결성되기도 전에 조봉암 선생을 비롯해 윤길중·조규회·박기출 등 수십 명에 달하는 간부들을 불법으로 구속시키고 당을 해체시켜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보수정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강정책 역시 이승만 정권하에서라면 과연 무사했을까? 틀림없이 당 간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에 가거나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을 겁니다.
어떤 이는 북한을 중국의 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에 이어 동북사성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영토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 경제가 현재와 같이 중국에 대한 예속이 강화되어 간다면 앞으로 통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상황이라 나온 예측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당장의 남북통일은 어렵더라도 남북대화, 물류 그리고 인적 교류가 이제라도 재개되기를 안타깝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천은 한국의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중심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한 기슭에 자리 잡은 '죽산조봉암지묘'는 아직도 무자비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입 이름 없는 바위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봉암 선생이 남기신 말인데 위 글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운동'으로 바꾸어야 하는 당위가 지금 이 시각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10월 1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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