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단동(丹東)에서의 새로운 요동 땅(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1.10.25)
나채훈의 중국산책
단동(丹東)에서의 새로운 요동 땅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압록강 접경에 있는 단동(丹東)시에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여 축구화를 생산하는 공장을 인천시와 인천유나이티드 축구단에서 투자하여 설립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꽤나 흥미가 쏠리는 일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중국의 요동 지역(옛 고구려 영토)을 여행하다 보면 산야(山野)의 모습이나 식생(植生) 등이 우리 눈에 크게 낯설지 않으며 만나는 사람들과도 외국인과 만나는 듯한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고 어조(語調) 역시 그렇다.
이 땅에 대해 근래 들어 중국 역사에 편입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따지고 보면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한무제(漢武帝)부터 수양제(隋煬帝), 당태종(唐太宗)의 침략까지 장구한 세월을 지켜냈던 광활한 고구려 강토가 어떻게 해서 버려지듯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되었는가.
신라가 당을 등에 업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수없는 싸움 끝에 당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한 것이 서기 676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평안북도나 함경남북도 지역까지 모두 잃은 셈이었다. 그 이후 요동 땅은 중국의 일부도 아니려니와 우리의 일부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공간적 범주는 이른바 삼한(三韓)의 범위를 넘지 못했으며, 중국의 경우도 중원(中原)을 포함하여 동으로 요서 지역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역사의 전개에서 보면 우리 것도 아니었고, 중국의 것도 아니었다.
물론 서기 427년 고구려가 만주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사정에서 고구려를 우리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요동의 중심국가 고구려가 한반도의 북부를 아우르는 융합국가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뿐이지 민족사관으로 주장하는 이들의 요구처럼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평양성에 도읍을 둔 고구려의 중심 역시 요동이었다. 인적 집단을 살펴보아도 고구려와 한반도는 크게 달랐다. 고구려의 주축이 된 종족은 맥인(貊人)계에 말갈계가 가담했고, 한(韓)계 일부가 포함됐을 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 한계(韓系)는 한반도 중남부에 분포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종족은 중국의 한족(漢族)이나 우리 한족(韓族)과는 동류의식이 있을 수 없었다. 문화양식에 있어서도 그렇다.
지리적 환경, 산업, 관제와 국가 조직, 신앙과 민속, 풍습과 의복 등 고구려의 그것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크게 다른 독립적인 것이었다. 물론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한국의 문화와도 어느 정도는 융합되었으나 그것은 주변부와의 연관성 정도이지 고구려의 본질적인 문화에서 볼 때 결코 다른 것이었음은 이미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들만의 부락을 이루고 고선지 장군 같은 고구려계 인물을 걸러냈으나 신라의 영역으로 이주한 일부 고구려인들은 자취없이 사라져버렸고, 일본으로 이주한 일부에 그 흔적이 다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후 고구려를 승계한 발해 역시 국가의 중심을 이루는 종족과 한반도의 종족 사이에는 동류의식도 없었고 역사인식도 통하지 않았으며 문화 면에서도 각각 독립적인 요소가 강했다.
역사의 연구가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라 민족 정서에 따라 굴절되고 각색될 수 없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분명 고구려는 요동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위대한 강국이었고, 그 나라는 신라와 당의 연합 세력에게 멸망당했다. 그리고 그 강토는 오랜 세월 잊혀져 있었다. 벌써 140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한족(韓族) 조상의 땅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한 때 그곳에 우리 조상이 살았던 과거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곳에 가면 낯설고 물 설은 먼 이국 땅이 아니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곳에 안동(安東)이 생겨 동방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갖더니 이제는 단동(丹東)으로 거듭났고, 이번에 우리 인천이 그곳에다 투자하여 북한 노동자를 고용해 새로운 경협 모델이 생긴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의미가 주어지고, 향후 동북아 평화의 밑거름이 되는 전기가 되었으며 하는 간절한 바람이 더 실감나는 것이다.
2011년 10월 25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