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인천의 정체성(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1.12.28)
인천의 정체성
/( 819 ) 조우성의 미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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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가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머나 먼 '미추홀'에 다다랐다는 것인데, 모세의 출애굽을 연상케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미추홀'은 지금의 남구 관교동, 문학동 일대이며, 조선초에 인천도호부를 그곳에 설치한 것을 감안하면 인천지역사는 이주민(移住民)의 후예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같은 인천으로의 이주가 가장 활발했던 것은 1883년 개항 직후다. '인천에 가면 일자리가 있다, 먹고 살 수 있다'는 '러쉬'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인구 이동현상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근대 농경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그 옛날 비류처럼 제 운명을 개척하고자 제 고장과 가족을 떠나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인천시민의 대다수는 '개척의지'를 지닌 용감한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그 개척의지는 1903년에 이미 활짝 꽃피우고 있었다. 가 본 적도 없는 태평양 망망대해의 고도 하와이로 과감하게 진출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천사람들이 주인공이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의 모습이었다
하와이동포들이 낯설고 물 선 해외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돕고, 광복 후 인천에 '인하공과대학'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전통적인 '개척의지'의 아름다운 귀환이었던 것이다. 그제 본보사설은 그 자랑스러운 정신을 인천의 정체성으로 되새기는 사업에 지역사회가 소홀해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지난 22일이 하와이 이민 10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객원논설위원
2011년 12월 2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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