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코닥(Kodak)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2. 1. 9)
코닥(Kodak)
/( 824 ) 조우성의 미추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
||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이때 '기록'은 문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개화기, 사진이 들어오기 직전 인천, 부산, 원산 등에서 우리 풍속을 그렸던 기산 김준근도 역사를 기록한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철, 김규진 등에 의해 이 땅에 사진이 소개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영상으로서 기록'하는 신식 과학기술이 도입되자 풍속화가들의 시대적 임무가 퇴색된 것은 물론이다. 사진은 혁명이었다. 또 귀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초기 우리나라 사진의 대부분은 '얼굴'을 찍은 것들이었다. 풍속이나 풍경, 일상사를 담거나 예술로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사진기의 대중화와 유리 건판이 일반필름으로 대체된 덕이었다.
1924년 인천사진구락부의 월미도 촬영대회, 1941년 김진근(金辰根)의 인천 최초의 D.P.점(경동4거리) 개점, 1946년 제물포사진동지회(회장 정용복)의 결성 등을 감안하면 그간의 사진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헐값에 내다 판 카메라의 수습과 6·25전쟁 후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필름, 해외현상소의 이용 등이 사진동지회, 광영회, 은영회 인사들의 활동에 활력소가 됐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무렵에 화려하게 선보였던 것이 '코닥' 필름이다. '코닥'은 중구 중앙동 경기매일신문사 옆 사진재료상 '신호양행'의 진열대에 무슨 보물인 양 진열돼 있던 사진문화의 대명사였다. 그런 영광의 챔피온 '코닥'이 일본 '후지'에 밀리고, 디지털카메라 전쟁에서도 참패해 마침내 창업 131년 만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세상의 흐름 속에 사라지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1월 09일 (월)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