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한비가 ‘돈봉투’를 받았을 때(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2. 1.17)
나채훈의 중국산책/
한비가 ‘돈봉투’를 받았을 때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한비자』 <망징(亡徵)> 편에 나라가 망하는 일곱 가지 징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공권력을 무시하는 권력 집단이 많고, 국가가 채무에 시달리는데 기업이나 개인에게 돈이 많고, 동맹국만 믿고 도움만 받으려 하거나 자국 내 투자보다 해외 투자가 많아져 자국민이 가난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호사스러운 풍조가 퍼져 서민이 곤궁한데 낭비가 심한 것,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것, 그리고 권력자가 백성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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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 현실에 맞게 표현을 가다듬었으나 실로 역조명해 볼만한 대목이 많다. 이 일곱 가지 징후에 요즘 파문이 수그러들지 않는 ‘돈봉투’가 어디에 해당할까? 원래 돈은 밝은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데 유별나게 민감하다. 그래서 ‘돈은 바퀴벌레와 같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곳에서 부산히 나돌다가 빛이 비치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리는 속성인 것이다. 반드시 부정한 검은 돈이라서 빛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 기피의 성격을 지닌 것이 돈이라는 말이다.
축의금이나 조의금, 또는 촌지, 급여를 봉투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서 우리뿐이 아닐까 싶은데 이를 부정적으로만 여길 일도 아닐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랫사람에게 수고한 값을 내리는 일을 행하(行下)라 하였는데 양반들은 돈을 직접 손으로 만지는 일을 천하게 여겨 기생이나 가마꾼, 하인들에게 행하할 때 접시에 돈을 담아 오게 하여 젓가락으로 집어 주었기에 여염에서는 젓가락 돈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젓가락 행하는 받는 쪽에서 볼 때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은밀하게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노출되는 것 자체가 자칫 모멸감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돈을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것은 이런 옛 풍토에 비해 한층 성숙한 모습이요, 예의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런데 정치판의 돈봉투는 옛날의 젓가락돈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1백만원이 든 봉투를 누구는 3개를 받고, 누구는 5개를 받는다. 직접 건네는 것도 아니라 젓가락에 해당하는 비서를 통해서다. 의원회관 곳곳에서 우리 방에는 몇 개가 왔는데 그쪽 방에는 몇 개가 왔느냐 하는 전화 문의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진 모양이다. 권력 집단의 썩어 문드러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들의 고과를 매길 때 관계 고위직의 내외 친족을 통해 간접 청탁을 하면서 은밀히 바치는 뇌물을 ‘고풍(古風)’이라고 둘러댄 뻔뻔스러운 작태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로 대담하고 거리낌이 없다. ‘고풍’이란 옛날에 있었던 아름다운 풍습이란 의미이지 뇌물이나 뒷거래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활을 쏠 때 옆에 있던 조정대신들이 칭송을 하기 마련인데 그 칭송에 대한 보답으로 하사하는 주식(酒食)이나 상(賞)이 고풍의 근원이다.
여야 공히 전당대회나 당 지도부 경선에서 돈봉투가 뿌려졌다는 걸 두고 “모두가 하는 일인데 이번엔 박 아무개 의원이 재수 없어서……”, “고 아무개 의원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폭로했을 거”라며 수근대는 사람들도 꽤 많다. 민주주의가 서구식 계약사회에서 발생한 정치제도이기에 연줄사회인 우리의 풍토에서는 불협화음을 낼 수 있다는 말일 텐데 일면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줄사회에서 선거가 이루어지면 필연적으로 연(緣)에 따라 표가 집산하는 걸 어쩌랴.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움직이는 표가 선거판이 커지거나 전국 규모가 되면 희석되기 마련이고 결국 이 연줄이 사라진 자리에 구린내 나는 돈봉투가 경쟁적으로 끼어든 사실을 우리는 너무 정치판의 관행으로 보지 않았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돈봉투’의 선거는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요즘 재창당이냐, 재창당에 준하는 쇄신이냐 하는 웃기는 작업을 자랑하고 있는 여당이나, 독이 될지 약이 될지도 모르는 80만의 투표 참여를 놓고 자화자찬하는 야당이나 모두가 이번 기회에 돈봉투 만큼은 말끔히 씻었으면 하는 간절한 부탁이다. 혹여 한비가 돈봉투를 받았으면 아마 이렇게 훈계했을 것 같다. -법(法)을 만드는 자들이 법을 우롱함은 망할 징조가 아니라 망하러 가는 지름길임을 알라.
2012년 01월 17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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