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이사장/수처작주(隨處作主)(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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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SAEUL Newsletter(2012 No.70)
수처작주(隨處作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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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 용 택
문명과 문화로 풀어보는 주체와 객체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입니다.
제가 며칠 전 무척 어려운 강의를 했습니다.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야기 듣기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강의 2~3일 전에야 그 대상이 고등학생들이라고 해서 부랴부랴 강의할 내용을 바꾸느라고 며칠 동안 밤새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려운 대상들을 반평생 넘게 가르치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강의를 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거익심조(去益深造)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거의 60년 차이가 나는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어떤 강의를 할 수 있을지 과연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고, 60년이면 세대가 두 번 바뀐 것인데 이토록 세대차이가 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고, 할 수 있을까? 제 평생에 여러 어려운 자리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지만 이 처럼 힘든 강의는 처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또 인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제게 후배이고, 또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천,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저희 새얼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새얼 전국학생·어머니백일장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분들도 아마 계실 겁니다. 혹시 백일장에 찹가한 적이 있는 분이라면 저를 기억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새얼전국백일장을 지난해까지 모두 26회를 개최했고, 내년에는 27회를 열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학교를 대표로해서 참가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중에도 올해 새얼 백일장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가하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어릴 적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선생님이 문명과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어째서 어떤 건 문명이라고 하고, 다른 어떤 것은 문화라고 부르는지 두 단어가 서로 비슷비슷하게 느껴져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교장 선생님들 중에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제게 설명해줄 수 있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제가 살면서 느끼고 깨우친 것을 한 번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어둠에서 밝은 데로 나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촌보다는 뉴욕이, 파리가, 런던이 문명적으로 앞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인천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명은 우리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문명이란 객체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좋아도 내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이용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내가 그 속에 있고, 내 정신이 그 속에 있고, 내 삶이 그 속에 있고, 내 역사가 대대로 이어오는 우리 풍속이 있는 그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문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에는 높낮이가 있어도 문화엔 선후가 없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한 20여 년쯤 전에 당시 KBS 사장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유럽을 돌아보며 그곳의 문화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갔다가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갈 때 들러서 식사를 하고 갔다는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자랑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치즈를 만든다는 거였습니다. 큰 접시에 아주 작은 치즈 조각을 가져다주면서 엄청난 치즈라며 칭찬을 하더군요. 통칭 프랑스에는 치즈만 350여 종류가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맛있는 치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나 먹어봤더니 저한테는 도통 쓰고, 짜고 해서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 사람들은 그 치즈라면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때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나라에 한 번 와봐라. 내가 된장하고 고추장 줄 테니까.” 그랬습니다.
문화라는 게 이런 겁니다. 버터, 치즈, 이런 거 다 좋은 겁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좋은 거지요. 물론 서구화된 식습관을 갖게 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보다 된장, 고추장이 더 몸에도 맞고, 더 좋다는 이야기이지요. 된장, 고추장의 가치가 따로 있고 버터와 치즈의 가치가 모두 제각각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명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선후(先後)가 있어도 문화에는 앞선 문화와 뒤처진 문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게 더 좋고 어떤 게 더 나쁘고의 구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서양 여성들처럼 키가 크고 눈동자가 파랗고 머리가 노란 게 좋습니까? 키가 작고 얼굴색이 노랗더라도 저는 동양 여성들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런 미추(美醜)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나라 여성들이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요. 누굴까요?
제 눈엔 한국 여성이 제일 예쁩니다. 서양에 가서 어린 학생들을 보면 참 예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자라서 나이를 먹고, 출가를 하고, 30~40대가 넘어가면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젊음의 기간이 짧은 거지요. 하지만 우리 한국 여성들은 젊음이 오래 갑니다. 나이가 60이 되고 70에 가깝도록 자기 건강과 피부와 자기 몸을 잘 관리한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건강하고, 아름답습니다. 물론 서양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는 동양 여성, 특히 한국 여성들이 더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더군요.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오래 전에 대학 교수들한테도 말했었는데 다들 제 말에 동의하더라고요.
요새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외과에 많이들 갑니다. 글쎄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전 그렇게 하는 것이 진실한 아름다움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은 농담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요즘 이상하게 장사꾼들이 많이 생겨서 성형수술이다 뭐다해서 수술들을 많이 합니다. 젊었을 때 너무 그렇게 하다보면 나이 먹었을 때 얼굴이 이상해집니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은 겁니다.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한 학생들이 뭘 만들어 놓으면, 처음 보기에 이것도 작품이라고 내놓느냐고 교수들이 야단도 칩니다. 여러분들이 산에 올라가면서 보는 그 마음대로 생긴 바위, 볼품없는 돌덩이라도 가만히 보면 다 아름답습니다. 그 돌덩이가 그 장소에 있을만합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거지요. 다시 말하면 서투른 조각 작품 보다는 볼품없는 돌덩이가 몇 배 더 친근하고 좋습니다.
제가 문명과 문화를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문명 또한 얼마든지 바뀌는 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처음엔 마차를 타다가 자동차가 생기고, 또 지하철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문화는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왜? 문화엔 역사가 있고, 함께 살아온 민족이 있고, 내 가족이 있고, 또 그 안에서 자란 내가 있기 때문이죠. 내가 바로 문화고, 문화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는 문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철학이 있고, 습관이 있고, 관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란 존재를 남이 아무리 좋아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문화라는 것을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지요.
탈서구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
제가 앞서 성형수술 이야기를 했는데, 요새 풍조가 내 것을 버리고, 그저 서양 것만 좋은 것인 줄 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가 없으면 오래 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자신의 뿌리를 유지하고, 문화적인 본질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아름다운 것이란 말씀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 곧 싫증이 나기도 하지요. 지금은 내가 이걸 제일 좋아하는 디자인, 스타일, 패션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또 다른 형태의 것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를 이루고 오랫동안 우리 안에 체화되어 있었던 본질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은 그렇게 쉽사리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매일 먹는 밥이 싫증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요즘 우리는 마치 서양 문명이 최고인 듯 여기며 배우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서양 것이 좋고 우리 것은 그것보다 조금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요. 그렇지만 근래에는 외국에 나가도 삼성, LG 등 국내 물건들이 최고로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한국 물건이 외국에 나가면 값싸고 품질이 좋다고 해서 팔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화는 제가 전에 서양의 치즈와 우리의 고추장, 된장의 예를 들어 문화에는 높낮이가 없고, 선후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문화적 다양성, 문화다원주의입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의 문화가 있는 것이고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의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버리고, 미국 사람, 중국 사람 흉내만 낸다면 그것은 원숭이지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화의 중심이 되고, 우리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우리가 세계에 나아가서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멋’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앞서 제가 문명은 계속해서 변한다고 했는데 문화 역시 우물물처럼 계속 고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만 항시 흐르고 또 흘러오는 것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확 띄진 않지만 계속해서 발전하고, 때로는 급격하게 발전하기도 합니다. 서구사회에서 문예부흥이란 ‘고전으로 돌아가자, 인간으로 돌아가자’라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 중세란 모든 것을 신(神)이 결정하는 사회였습니다. 그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등장 이후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바라보고 인간의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유일신 사회에서는 쉽게 나타날 수 없는 사상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는 그 모델을 찾을 수 없어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리스 철학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고대시대 그리스는 결국 로마제국에 병합되어 2,000년 동안 자기들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그리스는 언제 독립국가가 되었을까요? 1829년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두 그리스 사람들이고, 신약 성경 역시 모두 그리스어로 쓰여 있고,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 고린도에서 신도들에게 그리스어로 편지를 쓴 것을 고린도 전서라고 합니다.
바로 이 그리스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들이 서구의 문화적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서구의 문화적 뿌리가 이처럼 그리스에 있었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고전 시대로 돌아가자, 그리스 철학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에 가면 그리스 고전들이 남아 있었을까요? 막상 그리스에 갔더니 그 고전들이 남아있질 않은 겁니다. 고전 시대 이후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다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중세의 출현 등 대혼란의 과정에서 그것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거나 분실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동의 이슬람 사람들을 석유는 많지만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고, 후진국이고, 테러나 일삼는 나라로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외세와 야만의 침입으로부터 그리스 문화를 온전하게 지키고 보전하면서 계승하고 발전시킨 곳이 바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 취급 받는 이슬람 사람들이 서양 보다 먼저 도서관을 세우고, 서양 보다 먼저 학문기관을 만들어서 학자를 우대하고,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며 문헌을 번역하고 기록하여 남겼습니다.
중세에서 인문주의 문예부흥으로 넘어가던 시기 서구 사람들에게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원전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바로 중동의 이슬람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아랍어로 된 그리스 원전과 연구 성과들을 찾아 다시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이슬람 및 중동 사람들에게 엄청난 빚을 진 것이죠.
또 이슬람 문화는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한 사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가 무엇입니까? 1, 2, 3, 4, 5, 6. 이것을 로마 숫자로 표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Ⅰ, Ⅱ, Ⅲ, Ⅳ, Ⅴ, Ⅵ. 이처럼 로마 숫자로 수학을 했다면 십에 몇 승이라든가, 루트라든가 이런 계산이 가능했겠습니까? 아마 달나라에 가는 일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숫자만 보더라도 중동의 이슬람 사람들에게 인류는 큰 빚을 진 것입니다. 이처럼 대단한 공로를 세운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동 사람들이 가난하고, 테러나 하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누군가 와서 나라를 빼앗고, 석유를 빼앗아간다면 가만히 앉아서 순종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일본 사람들에게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였겠지만 우리는 그 분을 얼마나 존경합니까? 또 김구 선생을 얼마나 존경해요? 다시 말해 우리가 서구의 눈으로, 서양 사람들의 시각으로만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보아야하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힘세고, 잘 사는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의 시각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정신없다는 겁니다.
자신의 주체적인 정신, 의식이 없는 사람을 뭐라 합니까? 정신이 없으면 노예가 되는 겁니다. 노예가 무엇입니까? 남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 분들도 한 번 스스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모든 것을 내 의지대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는 사람인가?
세대 간의 대화, 청소년 문화와 소통하기 위해서
요즘 청소년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만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만의 약어와 은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죠. 제가 그 어린 친구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저도 몇 가지 단어를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깜짝 놀랐다고 하면 ‘깜놀’이라고 하고, 선생님을 줄여서 ‘쌤’이라고 하고, 엄마의 잔소리를 ‘엄크’, 그리고 뭐뭐 ‘돋네’라는 표현 같은 것들을 많이 쓰죠? 제가 공부해 온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페’라고 해서 노스페이스라는 브랜드 점퍼의 가격대로 본 사회계급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참, ‘다굴’이란 말도 배웠습니다. 요새 그들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이른바 다구리 당해서 여러분 또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슬픈 사건도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지 억압받고, 약자인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습니다. 미국의 흑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를 ‘슬랭(slang)'이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에겐 은어와 약어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어란 근본적으로 소통의 도구이며, 소통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은 아름답고 고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에는 힘이 있고, 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장에서 단어 하나만 바꾸면 그 문장이 살고, 단어 하나 잘못 바꾸면 그 문장이 죽어버립니다. 이처럼 말과 글에는 혼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도 우리에게는 이두 문자란 것이 있었지만 그 어른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지 않았다면 우린 어땠을까요.
우리는 한자를 2,000년 넘게 사용하면서 우리말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언어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얘긴 못하겠지만 그 어원을 따지면 우리나라 말의 약 70%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말, 우리글, 우리의 정신이 바로 그 한글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아름답게 가꾸고, 나와 말을 하는 상대와 건강하게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말을 소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슬랭이나 은어를 만들고 쓰는 것 역시 청소년문화의 일부분일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너무 경박한 용어는 사용하지 않도록 이곳에 계신 선생님들이 노력해주셔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GM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직원들을 선발하는데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를 능숙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와서 면접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결국 모두 떨어졌다고 합니다. 정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건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말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느냐고 물어봤더니 영어는 잘하는데 우리말로 기안문서 작성을 못하더랍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달달 외우고 흉내 내는 겁니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모국어를 잊으면 반편이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정신적인 기반이 없다면 결국 외국어를 잘해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이곳에 계신 선생님들께서 유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성(大聖) 공자(孔子)에게 배우는 학문의 길
여러분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칼 마르크스, 헤겔 같이 서양의 철학자들을 알고, 이런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건 똑똑해 보이고 지식이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서양 철학도 좋지만 저는 동양인이라면 『논어』를 비롯해 『맹자』, 『중용』, 『노자』, 『장자』 이 다섯 권은 한번쯤 꼭 읽어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논어』는 공자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공자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공자는 어떻게 그리 재주가 많으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옛말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해서 군자는 재주에 의존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군자는 자기(磁器)도 빚지 못해야 하고, 톱질도 할줄 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하찮은 일들은 모두 하인이나 노예들이 하는 것이고 나는 글이나 읽고 쓰는 선비인양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너희 스승은 대단한 학자 같은데 왜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많냐고 물은 거지요. 그러자 제자인 자공이 뭐라고 대답했느냐면 “우리 스승은 하늘이 낸 사람이기 때문에 학문도 밝지만 그런 재주도 많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공자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제자에게 하는 말이, 여보게 뭘 그렇게 이야기했는가. “나는 어려서 비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알게 되었다네(吾少也賤 故多能鄙事).”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공자입니다.
공자는 본래 사생아(私生兒)입니다. 공자의 아버지가 수청을 들라고 해서 세 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입니다. 공자가 원체 훌륭한 분이라 사생아라는 소리를 함부로 못하는 것이지, 사기를 쓴 사마천은 공자를 가리켜 야합(野合)이라고 했습니다. 야합이라는 게 뭡니까? 들에서 합했다는 말이지요. 적장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 사람인데도 공자가 왜 훌륭한가. 어느 종교나 학문이든지 이것이 진리다, 이것을 따르라, 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렇게 얘길 안합니다. 천하게 태어나 출생 신분을 극복하고 누구 하나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없이 그 위치까지 간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 내 기치가 이렇게 걸렸으니 나에게 와라,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현실 파악을 해서 거기에 대한 답을 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제자도 원망하지 않고, 주위 사람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 결함이 있다면 나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해야 할 사람도 나인 것입니다. 신한테, 부모한테 의존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그런 철학을 내놓은 것은 공자 외에는 동서양을 통틀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공자를 존경하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공자가 그런 빈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대 받고, 출세를 못했지만 사학을 열어 많은 제자가 그 사람을 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기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천재는 없다
영국의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라는 학자는 어떤 사람이 천재인가, 세상에 과연 천재라는 게 있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 결과를 낸 논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의 영감, 70%의 땀과 노력, 29%의 교육환경.” 이 말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천재란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요즘 영국 사람이 한 이야기인데, 2,400년 전에 자사(子思)라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했어요. “남이 한번 해서 어떤 것에 능숙하다면 나는 그것을 백번 행해야 하고, 남이 열 번해서 능숙해진다면 나는 천 번을 행해야 한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이 말은 다시 말해 ‘저 사람이 한 번 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다지만 넌 능력이 부족하다면 포기하지 말고 열 번, 백 번을 해라. 저 사람이 열 번을 해서 이룩한다면 너는 포기하지 말고 천 번을 해서 이룩해라’란 뜻입니다.
동양에는 이미 2,400년 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이나 말콤 글래드웰이 한 이야기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도리어 2,400년 전에 자사가 한 이야기가 더 실감이 나지요. 학생들에게 훈화하는 말씀을 해주실 때에도 동양 고전의 지혜를 이용하시면 훨씬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이 자리에 와 있는 우리들이 학생들에게, 젊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 ‘실패해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일 겁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교육은 어렵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어떻게 실패를 안 합니까? 배우고 익히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일선에 계신 여러 선생님들이 노력해주셔야 합니다. 또 여러 선생님들 역시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어느 날 초(楚)나라 섭현(葉縣)의 장관 심제량(沈諸梁)이란 사람이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너의 스승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공자가 비천한 출신인데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니 얼마나 비꼬는 사람이 많았겠습니까. 그런 대목이 논어의 여러 곳에 나옵니다. 자로는 스승의 인품이 일반인과는 매우 다른 탁월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언뜻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공자가 이 사실을 알고 자로에게 이르기를 “왜 학문에 발분하면 끼니도 잊고 도를 즐기며, 근심과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는 데에도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대답하지 않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제가 공자를 공부하면서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이었습니다. 공자가 주역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하도 많이 읽어서 책을 꿰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니 종이가 낡아서 찢어지면 찢어졌겠지 가죽 끈이 끊어진다니 무슨 말이가? 했습니다. 물론 공자가 그만큼 책을 많이 봤다는 뜻이겠지요. 그랬는데 제가 나중에 중국의 박물관들을 다니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 책은 죽간(竹簡)이라고 해서 대나무를 잘라 거기에 글씨를 쓰고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를 가죽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나무를 폈다 말았다 하면서 책을 읽다보면 가죽 끈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대성(大聖)이라 일컬어지는 공자 같은 분도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책을 봤다는 겁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공자님도 이처럼 쉼 없이 노력한 결과로 그런 성취를 얻어낸 것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지요. 공부에는 늦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제 자랑하는 듯해서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저 역시 나이 오십이 넘어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중국어를 말로는 잘 못해도 이해는 빠릅니다. 위대한 스승은 먼저 훌륭한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자
당나라 때 임제라는 큰 선승이 계셨는데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딜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라. 어떤 환경에 처하든 그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서있는 그곳이 어디든 참의 길, 좋은 곳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비록 한 반에서 같이 생활하고 공부하고 있지만 시험 점수로 등수가 매겨집니다. 또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 살다보면 어떤 사람은 저 만큼 앞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저 만큼 뒤에 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 뒤쫓아 가는 사람 같지만 인생이란 큰 행로에서 보면, 또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앞선 사람 같아 보이지만 앞서지 않은 것일 수 있고, 뒤에 처져 있는 듯 보이지만 뒤에 처져 있는 사람이 도리어 앞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교육이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앞세우다 보니 남이 가면 무조건 따라가는 교육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일까요? 앞서 비천한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해 결국 큰 스승이 된 공자의 이야기도 했지만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책무와 소임을 다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당(唐)나라는 성당(盛唐)이라 하고, 송나라는 부송(富宋)이라 불렀습니다. 부유한 송나라였지만 문약(文弱)에 빠진 나머지 국방력이 약했기 때문에 늘 이민족 요나라에 이어 금나라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125년 금나라는 송나라의 수도, 지금의 개봉(開封)을 침탈하였고, 이것을 정강(靖康)의 변(變)이라 합니다. 휘종(徽宗) 황제와 그의 아들 흠종(欽宗)을 비롯해 후비, 황자, 공주 등 도합 3,000여 명에 달하는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은 금나라에 끌려가 금의 발상지인 동북 오국성(五國城)에 유배되어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바로 그때 일어난 일입니다.
수도 개봉을 점령한 금나라 장수는 송나라의 황실 친척들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송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 나라의 재건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매국노가 넘쳐나는 법입니다.
“종정사(宗正司)에는 황실의 족보가 모두 보관되어 있으니 그 족보만 손에 넣으면 황실 가족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나라 장수는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마도 그런 사실을 밀고한 배신자에게는 커다란 상금이 내려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개봉에 가면 종정사 건물은 없지만 그 터는 남아 역사의 순간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종정사를 지키는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소부(邵溥)라는 충직한 하급 관리 한 명만이 남아 황실 족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금나라 장수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부는 황실 족보를 두세 장 건너 한 장씩 찢어 화로에 던지며 탄식했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 족보 전체를 태울 수는 없구나! 내 평생 한으로 남을 일이다.”
기록에는 소부가 태운 족보가 3할은 된다고 합니다. 소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없앤 족보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과 더불어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 조구(趙構)는 장강을 넘어 남경을 거쳐 전전하다가 항주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곧 남송(南宋) 152년의 시작입니다. 주인의식이 있는 한 사람의 공직자 덕분이었습니다. 송나라가 남북으로 존립하는 비극을 맞이하니 애국지사들도 많이 나오고 간신배들도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힘도, 이름도 없는 일개 하급 관리이자 서민이었던 소부의 주인의식과 실천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는 나라를 152년간이나 버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북송에서 피난 나온 사대부 사람들이니까 글도 잘 읽고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성리학의 주자, 그분도 그때 사람입니다.
제가 한동안 다른 문헌에서도 소부를 찾느라고 노력을 했는데 역시 미관말직이고 사대부가 아니니까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제가 지금 이야기한 기록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의 도시화 속에서 이름 없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바르고 힘이 있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공부하고, 많이 듣고, 넓게 보고, 생각하며 실천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교장 선생님들이 일선에서 한 명의 훌륭한 세계시민을 키워내는 교육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우리 학생들을 한 명의 훌륭한 인격체로 키워주시리라 믿으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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