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정승열(65회) 세상思/ 자랑스런 도시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2. 4. 4)
세상思 /
자랑스런 도시
/정승열 인천문협 회장
![]() |
국내 여러 고장을 여행하며 그 고장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비록 대단한 지위를 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자기고장을 자랑스러워하고 거기에서의 삶을 만족해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자기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져서 돌아오는 내 모습이 스스로 처량하다. 인천시민들 중 인천이야기가 나오면 저들처럼 긍지를 가지고 대화를 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천이란 도시가 개항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형성되고 발전돼온 탓에 지역에 대해 자신의 고향만큼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건가. 물론 이런 연유로 인천은 응집력이 없다느니, 인천사람들은 애향심이 없다는 자조석인 소리가 더러 나오기도 한다. 이런 마당에 외지에서 여행 온 사람들에게 시민들 스스로가 긍지를 가지고 인천을 소개하는 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어디서 왔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삶의 터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그 속에서 행복한 삶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만큼 이곳은 의미있는 곳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삶의 의미를 자식들이 체험하고 습득한다. 이곳은 자식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가는 공간이며 언젠가는 그들이 고향이라고 금의환향할 장소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자랑스런 고향을 미리 심어주자.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고향을 돌아보며 얻은 체험과 지혜와 용기로 극복해 나갈 힘을 미리 심어주자.
인천이란 도시가 개항 이후 형성된 도시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인천은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과 소중한 흔적을 간직한 곳이라는 점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아이들에게 또한 인천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천의 긍지'로 꼽아 줄 만한 몇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천은 왕조탄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귀한 도시 중 하나이다. 바로 비류백제가 세워졌던 미추홀왕국이 인천이다. 이것은 그냥 떠돌아다니는 항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설(始祖說)에 나오는 정사의 한 대목이다. 비록 온조백제에 병합되는 비운을 겪지만 하나의 나라가 탄생되는 과정에 기억될 만한 역사적 사건을 인천이 안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조선상고사'를 쓰신 신채호선생은 같은 책에서 '미추홀(彌鄒忽)'은 우리말 '메주골'의 백제 이두식 표현이며, '매소홀(買召忽)'이라는 고구려식 이두표현과 상당히 근접한 발음을 보이고 있으며 같은 말의 한자로 전환된 표현이 인주(仁州) 또는 인천(仁川)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여서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에 중요한 전투로 언급된 관미성전투는 한강 하류를 관장하는 지금의 교동도에서 백제와 벌어진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는 백제를 제압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가 30여년간 고려의 수도로 경영된 곳이기도 하다.
인천은 어느 역사에서나 한강 하류에 인접해 있어 수도인 개성과 한성의 관문으로 중히 여겨지기도 했다. 그 중요성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구한말 외세에 의해 강제 개항할 당시 인천은 서양제국들이 가장 눈독을 들인 항구였다.
결국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가장 심하게 겪은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건들이 모두 인천에서 이루어 졌다. 기차가 처음 놓였고 전신국이 최초로 세워졌다.
수도가 처음 놓인 곳도 근대 서구식공원이 처음 만들어 진 곳도 인천이다. 그밖에 짜장면을 처음 개발해 팔기 시작한 곳도, 그 유명했던 고무신을 고안해서 판 것도 인천이었다.
그러는 사이 인천사람들이 근검절약하고 합리적으로 생활하는 선진지혜를 터득했으며 그것이 다른 고장사람들에게 짠물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자라나는 우리 후손들과 여행객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인천은 자랑스런 도시라고.
2012년 04월 04일 (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