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인천의 6·25 전쟁(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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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2. 6.25)
조우성의 미추홀 - 인천의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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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새벽 5시, 작은 보랏빛 섬들이 촘촘히 수놓인 인천 앞바다에서 붉게 물든 여명을 배경으로<중략> 20여㎞에 걸쳐 반원형 대형을 펼치면서 200여 척이 넘는 (연합군) 함선이 서서히 전진했다."
▷"해병들은 부상자가 (불과)18명이었다. <중략> 일단 월미도를 접수한 후 인천항과 내륙의 두 번째 공략에 나서기 전에 저녁 밀물 때를 기다려야 했다. 앳된 해병대원이 다소 상기되어 사자굴에 뛰어든 것 같다고 했다."
▷"밤이 되자 눈앞의 광경은 정녕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 항만 전체가 을씨년스런 자줏빛으로 환하게 불타올랐다. 바다와 하늘은 피처럼 검붉었다.<중략> 우리들 누구도 절대 이 '스펙터클(불의 궁륭)'을 잊지 못하리라."
▷"인천은 여전히 연기가 치솟는 죽음의 도시였다. 담배공장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중략> 한 청년이 끔찍한 부상을 입은 할아버지를 손수레에 싣고 대로를 걸어 내려왔다.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슬픈 장면이다."
▷"한국군 해병대는 도시 '소탕'에 나섰다. <중략> 마침내 시내가 '소탕'되었을 때, 이웃고개에서 주민 수백 명이 보였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미친듯이 '만세'를 외쳤다."
▷"약탈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부두로 달려가 그곳 쌀 창고를 찾아내 문을 부수었다. 그들은 소중한 곡식을 자루와 냄비, 손아귀에 황급히 주워 담았다. <중략>해산시키기 위해 공포탄을 쏠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6·25전쟁 62주년을 맞는다. 네 명의 프랑스 종군기자가 쓴 전쟁르포 '한국전쟁통신(원제 '한국에서 돌아오다' 정진국 옮김. 눈빛출판사 간)'을 읽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정황이 사실적으로 기술돼 있었다. 전쟁 한 가운데서 처절하게 도생(圖生)했음에도 변변한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던 우리의 인문풍토(人文風土)가 부끄럽게 생각됐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6월 25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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