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장수(將帥)는 부하로 말한다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2. 8. 7)
나채훈의 중국산책/
장수(將帥)는 부하로 말한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 이영호의 ‘숙청’을 두고 갖가지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는 분이 ‘반란 가능성 때문에 인민군 최고 수뇌부에는 멍청한 충성분자들로 채워졌지만 핵심인 오극렬과 이영호는 전략과 전술을 아는 장수로 인민군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들이었다’고 썼다. 그러니까 숙청당해서는 안 될 고급 인재였다는 의미인지 전략 전술을 알기에 무모한 대남도발을 하지 않을 인물이었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이영호가 천안함 폭침에 연관되어 있다는 걸 다음 구절에서 지적한 걸 보면 북한군 장수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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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군의 기량을 제3자가 잰다는 것은 거의 무망한 일일지 모른다. 중국을 대제국으로 만든 원조 황제인 한무제 때 남북의 최대 격돌이 있었는데 흉노와의 전쟁이었다. 흉노와의 싸움에서 이름을 날린 장수 가운데 이광(李廣)과 정부식(程不識)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루었지만 성격이라든가 업무 처리 방식에서는 전혀 달랐다. 이광은 원래 장수 가문의 후예로 맹장 대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데 그는 행군할 때 대오(隊伍)나 행진(行陣)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명령하여 그의 병사들은 마치 무질서한 무리의 대명사처럼 제멋대로였고 심지어는 원정을 나가 야영(野營)을 할 때도 ‘각자 적당한 곳에 편한 대로 막사를 설치하라’고 하는 등 군기나 군율이 거의 없었다. 사령부의 연락 문서 같은 것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했으며 크게 소용되지 않는 것은 아예 없애버렸다. 이광 장군은 이렇듯 무질서에 방관자처럼 행동했으나 항상 척후병을 먼 곳까지 투입하여 흉노의 적정을 살피고 있었으므로 적의 기습을 받는 일은 없었다.
정부식 장군은 전혀 달랐다. 그는 매우 치밀하고 꼼꼼한 성품으로 행군을 할 때도 열과 오를 맞춰 마치 사열하는 듯이 움직이게 했고 병기나 복장의 점검도 엄했다. 허리끈이 조금만 풀어져도 기합을 내릴 정도였다. 병사들은 그래서 정부식의 부대에 배속되는 걸 싫어했다. 이광의 부대에 배치되면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의 부대에 배치되면 크게 낙담을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부식의 중얼거림이 전해진다.
- 이광의 부대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신경 쓸 일이 없어 편했을지 모르지만 만일 적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면 막기가 힘들 것이다. 내 부대는 기율이 엄하고 행동하는데 귀찮을지 모르나 적의 기습을 받는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 쪽이 훨씬 안전한 부대인데 어째서 병사들은 이광의 부대에 가길 원하는가. 환성까지 지른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유만부동이지…….
정부식 장군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적군인 흉노 쪽에서 정부식의 부대보다 이광의 부대를 훨씬 더 두려워했다. 상대가 아는 병법의 틀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분망했기에 흉노는 이광의 작전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두 사람은 나란히 수도로 들어와 동·서 근위사단장이 된다. 이광은 황제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의 근위대장이 되고, 정부식은 황태후가 거처하는 장락궁(長樂宮)의 근위대장이 되는 것이다. 황제가 최고권력자이긴 하지만 황태후는 궁궐의 어른으로 황제의 생모일 경우는 실질적인 최고통치자가 되기도 했었다. 황제를 모시는 이광, 황태후를 모시는 정부식을 두고 당시 조정 관리들 사이에는 지지하는 편가름이 심했던 모양이다. 물론 당파는 아니었고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일처리 방식에 대해 누가 명장이며 훌륭한 전략 전술가인지 토론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그런 갈등이었다고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적고 있다.
야전에 어울리는 저돌형 장수가 있는가 하면 참모본부에 앉아 지휘하는 지략가형 장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돌형인지 지략형인지 딱 구분할 수 없는 장수도 상당수 있게 마련인데 이런 장수들을 쓸모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현대에서는 양쪽의 장점을 소화하고 단점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중간형 장수가 명장이랄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이광이 죽었을 때 병사들은 물론 민간인들도 크게 통곡했는데 정부식의 경우는 아무런 후일담이 없다. 이영호의 숙청을 둘러싼 추측에서 장수의 자질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의미를 갖는지 한번 생각해 봤다.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2012년 08월 07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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