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중국산책/지도자의 품격과 면목에 대하여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신문(12. 8.21)
나채훈의 중국산책/
지도자의 품격과 면목에 대하여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사면초가(四面楚歌)에서 사랑하는 우미인을 잃고 겨우 빠져나온 항우가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 주위에 부하라곤 28기밖에 남지 않은 참담한 몰골이었다. 그곳 정장(亭長)이 강가에 배를 대기시켜 놓고 맞이하면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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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땅이 비록 좁다고 하나 천리에 걸쳐 있고, 주민도 수십 만 명이니 얼마든지 나라를 세워 왕 노릇을 하실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서둘러 배에 오르십시오.”
항우는 공허한 웃음을 날리며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 몸소 70여 회나 싸웠으나 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하늘이 나를 버리려는데 건너간들 뭣 하겠느냐? 강동 땅 자제 8천여 명과 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었다. 지금 그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강동의 부형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이냐.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어여삐 여겨 왕으로 받든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 찔리는 바가 어찌 없겠는가.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구나.(無面渡江)”
항우는 끝내 강을 건너지 않고 추격해 오는 한군 쪽으로 달려가 힘껏 싸우다 자결했다. 이 일을 두고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안타까워하며 ‘승패는 기약하기 어려운 병가의 일 / 수치를 참고 견뎌야 사나이 아닌가 / 강동의 자제에 인재가 많아서 /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나타날지 그 누가 알랴(捲土重來未可知)’고 읊었다. 권토중래의 고사는 여기서 연유된다.
하지만 항우는 끝내 강을 건너지 않았기에 당당한 천하의 인물로 추앙받게 된다. 냉철한 역사가 사마천은 ‘권토중래’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훌쩍 뛰어 넘은 항우에게 한나라 창업주 유방과 동격의 대접을 했다. 심지어는 유방과의 대화를 빗대어 천하를 염려하는 깊은 뜻을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유방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이 계속되자 항우가 일대일로 맞장 승부를 제의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천하가 이토록 시끄럽기 몇 해인가. 이는 오직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그대와 한판 승부로 자웅을 결하자. 더 이상 쓸데없이 천하의 백성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젊은 청년들은 모조리 군대에 동원되어 죽고 다치는 세상, 노인과 아녀자들은 육지에서 산악에서 강물 따라 군량과 전선 보급물자를 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천하 동란의 종식을 원했던 것이다. 패배자의 처량한 몰골이 아니라 담대한 호걸의 풍도가 완연하다.
사마천은 사기 본기(本紀)에 ‘항우본기’를 설정해서 항우를 예우하기도 했다. 유방의 뒤를 이은 2대 황제 혜제(惠帝)는 본기에 넣지 않은 채. 그러니까 그의 재위는 8년,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후(呂后)였다고 보아 오히려 ‘여후본기’를 넣었다.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역사를 바르게 기록한다’는 사마천의 굳센 의지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즘 대선 정국을 보고 있으면 여야 공히 경선이라기보다 추대식 내지는 마이너리그나 다름없이 보인다. 지지율이 5%도 안 되는 후보들이 난립이다. 언제쯤 그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판을 떠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은 궁색해 보이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칫 터무니없는 폭탄 발언이라도 나올까 양식 있는 국민들이 오히려 전전긍긍할 정도다. 배포가 중단된 민주당 경선 홍보물에 인기 개그 프로그램 ‘용감한 녀석들’을 패러디하고, ‘역전드라마를 보여줘!’라는 카피가 등장한 해프닝이나 ‘공천헌금이 아니라 공천장사다. 장사의 수지계산은 주인에게 돌아간다. 그들의 주인은……서슬이 퍼레서 사과도 하지 않고 얼렁뚱땅’이란 글에서 본질은 실종되고 ‘욕’에 대한 이야기만 풍성한 것도 좋은 예일 것이다. 국가지도자에게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승패를 떠나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이다. 특히 자화자찬이 아닌 냉철한 객관적 시각의 자기 성찰은 물론이려니와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는 면목 정도는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송대(宋代)의 기개 있는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는 일신의 영예만 탐닉하는 조정을 꾸짖기 위해 ‘살아서는 인간 세상의 호걸이 되고 / 죽어서는 영웅이 되어야 하리 / 지금까지 항우를 기리는 까닭은 / 강동으로 건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세’라고 「하일절구(夏日絶句)」에서 읊었다.
2012년 08월 21일 (화)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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