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국극(國劇)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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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2. 8.17)
조우성의 미추홀-국극(國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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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산조 명인 김병호 선생은 1959년부터 인천여고에서 전통음악 강사로 재직해 지역 문화예술계에도 알려진 국악인이다. 1937년 조선창극단 단원으로 출발해 1941년 임방울 창극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부터는 서울대 음대와 국립국악원에서 연주자와 강사를 지내며 후학을 길러냈다.
▶선생은 1968년에 작고했는데 특히 1950년대에 임춘앵 국극단의 악사로서 인천 애관극장 무대를 찾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국극단 단원들이 정상급 국악인들이었음을 말해 주는 예라 하겠다. 더불어 싸리재 애관극장, 도원동 용사회관 등 시내 극장에 내걸렸던 간판에 등장했던 남장(男裝) 여성 국극인들의 과장된 화장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들도 기억난다. "임춘앵과 그 일행, 인천을 찾다!"는 선전 문구도 인상적이었다.
▶라디오와 영화가 대중문화의 대종을 이루던 시절, '국극(國劇)'은 독특한 예술 장르로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미국 영화 삼손과 데릴라, 에덴의 동쪽, 젊은 사자들, 베라크루스, 세인 등이 들어왔을 때 당당히 어깨를 겨뤘다. 국산영화가 한해에 10여 편 제작될 때 국극은 30편이 넘게 공연됐다.
▶대표 격인 국극단은 '임춘앵과 그 일행'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여의주', '바우와 진주목걸이', '구슬공주', '원본 춘향전', '무영탑', '낙화유정' 등을 공연해 선풍을 일으키자'햇님 국극단', '삼성 국극단' 등 30여 개의 극단이 난립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도 전한다. 1955년 과로 끝에 임춘앵 여사가 인천에 와 잠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죽었다'는 소문이 나 장안의 큰 화제가 됐었다. '가짜 임춘앵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그가 남자인 줄 알고 사모했다가 자살한 열혈 여성 팬도 있었다.('여성 국극 왕자 임춘앵 전기' 백중당, 2002년 간)
▶오늘날 '국극'은 잊혀진 공연 양식이 됐지만 부활해 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이 국악과 춤으로써 역사와 전설을 풀어나간 이 '한국판 오페레타'는 훌륭한 대중예술이었던 것이다. 최근 국극계의 마지막 생존 스타였던 조금앵 선생이 작고했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국극도 사라지고, 그 주역들도 세상을 떠나고 관객들도 나이가 들어 희미한 추억 속의 무대를 떠올리고 있다. 인생도 예술도 그렇게 가는가 보다.
/객원논설위원
2012년 08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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