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문재(77회)의 시의 마음]/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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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경향신문(20. 6.16)
[이문재의 시의 마음]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충남 청양군 운곡면 방축길 참동애농원.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더니 도착까지 2시간 남짓.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해 외출을 자제해야 할 때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개인 위생수칙을 잘 지키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차를 몰았다. 서울을 벗어나자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굳이 청양을 찾게 된 계기가 있다. 얼마 전, 아내가 옷가게에서 건구기자를 사온 것이다. 옷가게에서 구기자를? 내가 의아해하자 아내가 답하기를, 옷가게 여주인 아들 부부가 청양에서 구기자농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귀농한 젊은 부부가 음악을 전공했다는 것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농사를 짓다니,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칠갑산이 멀지 않은 마을, 허름한 농가 앞에 차를 세웠다. 이제 막 삼십대로 접어든 초보 농군 부부는 동갑내기에 신혼이었다. 피부가 그을리지 않고 사투리도 쓰지 않아서 옷만 갈아입는다면 영락없는 도시청년이었다. 부부가 청양을 선택한 이유는 서울에서 멀지 않고, 특산물이 있기 때문이다. 청양은 고추와 구기자 산지다. 2018년 봄,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에 지금 사는 집과 밭을 임차했다.
남편 박우주씨는 드럼, 아내 유지현씨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두 사람은 서울 강남의 음악학원에서 함께 일하면서 눈이 맞았다. 학원에서 5년 넘게 열심히 일했지만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둘은 결혼을 약속하고 서른 살이 되면 새로운 삶에 도전하자고 결심했다. 네 가지 기준을 세우고 앞날을 설계했다. 부부가 함께할 수 있고, 평생 할 수 있으며, 가치와 의미가 있고,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이 요건을 충족시킨 것이 바로 농업이었다.
도시를 떠난다고 했을 때 반대가 없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밭에 씨앗을 뿌리고 올라오는 아들딸을 보고 양쪽 부모님은 한발 물러섰다. 그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첫 한 해는 농사를 배우는 기간으로 정하고 이웃 주민들을 스승으로 삼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행히도 이장님을 비롯해 마을 어른들이 도와주기 시작했다. 부부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편 청년 농부를 지원하는 제도도 적극 활용했다.
올 농사는 구기자 400평, 고추 400평 규모. 부부는 신세대답게 온라인 판로를 확대하기 위해 인터넷을 활용한다. 유튜브(청양농부참동TV)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남편이 카메라를 잡고 아내가 리포터 역할을 하며 귀농일지를 올리는데 구독자가 2만명이 넘는다.
부부가 농사만 짓는 것은 아니다. 전공을 살려 지역 축제에 나가 연주를 하고, 특강을 나가기도 한다. 농한기에는 국내외로 여행을 떠난다. 계획한 대로 농사가 진척되면 부부는 2년 뒤쯤 가까운 곳에 집과 땅을 마련하고 젊은 친구들과 손잡고 공동체를 꾸려나갈 생각이다.
부부가 귀농한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였다. 번잡한 일정, 각박한 관계, 살벌한 경쟁을 떠나 자연과 더불어 의미 있는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월급쟁이와 농부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이다. 임금노동자의 시간이 임금을 지불하는 자의 시간이라면 농부의 시간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도시적 삶은 벌기 위해 사는 삶이고, 땅에 뿌리박은 삶은 살기 위해 버는 삶이다. 진정한 귀농은 삶의 목적을 소유에서 존재로 바꾸는 것이다.
소유와 소비가 삶의 질을 좌우하는 도시적 삶을 거부하고 땅으로 돌아간 사람을 나는 ‘미래를 먼저 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미래로 먼저 가 있는 친구들이 사는 곳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강화, 화성, 옥천, 속초, 경주, 나주, 장흥, 제주. 시인을 비롯해 예술가, 활동가가 터 잡은 곳이다. 내게는 저 지역들이 아직은 미미하지만 ‘좋은 삶’의 발상지로 보인다. 가난하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삶들이 모여 공생공락하는 사회가 탄생하는 곳 말이다.
악기 다루는 손으로 농사를 짓는 젊은 부부를 만나고 돌아와 며칠째 되뇌는 이야기가 있다. 석유가 발견되면서 벼락부자가 된 중동 지역에 알려져 있다는 우화다.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아들은 비행기를 탄다. 아들의 아들은 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경고다. 사막의 낙타가 지금 우리에겐 농업일 수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는 농업을 하고 아버지는 상업을 하고 아들은 서비스업을 한다. 우리 아들의 아들은 아마 다시 농업을 하게 될지 모른다. 미래를 먼저 사는 사람들을 새삼 눈여겨볼 때다.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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