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인천국제공항 개항이 인천의 진정한 개항”(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24. 6.19)
개항(開港), 어떻게 볼 것인가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국제공항 개항이 인천의 진정한 개항”
1883년 인천개항, 日영사관 직원 주재로 진행
강압에 못 이겨 항구 문 연 농락당한 굴욕 역사
'기억'한다면 모르되 '기념한다'는 것은 부적절
2001년 우리 힘으로 세계를 향해 하늘길 열어
시대 걸맞은 능동적이자 역동적인 역사의 도약
'ICN'은 인천의 자산…진정한 개항의 상징물
▲ 개항100주년기념탑.
1983년, ‘개항 100년’을 기린 인천시
1983년 6월20일 김찬회 인천시장은 “지난날의 이모저모를 종합적으로 수록한 '인천개항100년사'를 편찬하게 된 것을 매우 의의 있고, 또한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인천개항100년사' 출간 의미를 밝힌 바 있다.
인천시는 그에 앞서 '인천개항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2년 6월 중구 항동 7가 52 연안부두 교차로 부지 394평, 높이 36m의 거대한 '기념탑'을 착공했다.
건립 비용은 11억4000만원(현재 약 110억 원 상당)으로 여신상 1기, 승선 선원상 10기, 시민상 2기, 개항 상징상 1기 등이 각각 조각돼 있었다.
이에 대해 인천시는 1988년 발행 책자 '향토인천'에서 “개항100주년기념탑은 개항 이래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 온 업적을 기념하고, 강인한 의지와 화합으로 영구히 번영할 인천항의 미래를 상징하기 위해 1983년 7월 1일에 세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천 개항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 온 업적을 기념했다”는 기술과 '인천항의 미래를 상징하기 위해' 이 기념탑을 세웠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1883년 인천 '개항'을 역사적인 사실로 '기억'한다면 모르되 이를 '기념한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다.
'연세한국어사전'에 따르면, '기념'은 “중요하거나 특별한 일을 기억에 간직하여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기념하다'는 “중요하거나 특별한 일을 기억하며 축하하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인천개항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탑을 건립했다는 것은 곧 이를 '개항을 기억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축하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개항'을 극명하게 명암이 갈리는 뼈아픈 역사적 사실로 '기억한다'면 모르되, 이를 '축하한다'는 것은 개항 전후사를 따져볼 때 어불성설임에도 인천시가 거금을 들여 연안부두 대로 한복판에 당당하게 '개항 축하 상징물'을 세워 오가는 시민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기념탑은 구조 자체에서도 큰 오류를 지니고 있었다. 탑신 최정상에는 국적 불명의 거대 '여신상(女神像)'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데, 그 자세가 내륙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아래 어선과 어부상, 시민상도 다 같이 내륙을 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개항 주체가 '조선'이 아니라 해외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다른 '세력'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개항 주체가 '조선'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 명확한 일이다. 그러나 이 기념탑이 그 같은 포함외교에 의한 역사적 굴욕을 오늘날 우리가 기리고, 함께 축하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인천일보는 지면을 통해 이 기념탑의 역사적 모순점과 기괴한 왜곡을 계속 지적하며, 철거해야 한다는 기사를 누차 게재한 바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3년 4월19일 인천의 지식인들과 시민단체 등이 그에 호응해 여론이 형성되면서 인천시가 마침내 이 탑을 철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1883년 '인천 개항'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일까?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나 여기서는 개항 빌미가 되었던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게 된 추이를 간략히 전하기로 한다.
▲ 당시 조선이 처한 정황을 그린 외국 만평.
'운양호사건'을 꾸민 일본의 정한론자들
일본은 1853년 7월8일 도쿄만에 나타나 대포를 쏘아대며 개항을 요구한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위세에 눌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강요된 근대'를 받아들인 일본 정가에는 그 후 '정한론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 만주,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조선이 수교에 응하지 않자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을 상대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다가 일본은 1875년 운요호[雲揚號]로 영종도, 강화도를 침공하고, 결국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게 했다.
이 조약은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 조약으로 영일조약(1858년)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부산, 인천, 원산의 개방을 요구하고 치외법권과 무관세 무역을 조선에 관철시킨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때 면암 최익현은 1876년 궁궐 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읊었다. 그는 왜인과 외국인은 다를 바 없다며 “제물포는 도성의 인후라, 제물포를 개항하는 것은 곧 조선을 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절규했다. 이를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라 한다.
이어 1879년인 7월16일, 조정 대신들도 연명으로 인천 개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소를 올린다. 대신들은 “서울에서 100리 내에 가까이 있는 관계로 (개항을) 허락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높고 낮은 관리들의 여러 의견이 시종일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종에게 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에 의해 지정된 '인천'의 개항을 끝내 막지 못했다. 이는 마치 “도적들에게 내 집을 털어가라”며 대문을 열어준 것이요,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서구 근대자본주의의 변방에 타의에 의해 편입된 사건”에 불과하며, 그 후에 유입된 개화 문물의 대부분은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각에 의해 굴절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인천 개항은 한마디로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조선이 일본에 농락당한 굴욕적 역사의 한 장면이었던 셈이다.
▲ 인천 개항을 준비했던 당시의 일본영사관직원들.
일본인이 도맡아 준비한 '인천 개항'
개항 준비 작업은 전적으로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선인은 이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 '인천부사(仁川府 1933년)에 따르면, 1882년 개항 사무를 전적으로 관장한 사람은 훗날 인천부윤을 지낸 '히사미즈 사부로(久水三郞)'이었고, 위원으로는 '곤도오 신스께(近藤眞助), '타카오 켄조오(高尾謙三), 스기무라 후가시(杉村濬) 등 3명이었다.
▲ 인천 개항 알린 일본 태정관의 관보
이들은 짜낸 '인천 개항'은 마침내 일본 측 최고 기관인 '태정관 (太政官)'의 1883년도 포고달(布告達=布告와 유사한 법령) 제30호에 1876년 2월 조선국과 체결한 수호조규 제5관의 취지에 따라 경기도 인천을 개항하니 1883년 1월 이후 해항(該港=仁川港을 지칭)에 건너감을 득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1883년 항목 어디에도 인천의 '개항'을 명시한 바가 없다. 조선에 '근대화의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항' 주체가 일본이었고, 그들의 흉계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인천 개항의 근원적 모습이었다. 이는 결단코 '기념'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기억하고, 축하할 수 없는' 불행한 역사 전개였던 것이다.
▲ 일본인들이 축하한 개항50주년의 기념엽서.
일본은 일제 강점기에 열렬히 '인천 개항'을 축하하고, 이를 통해 조선이 크게 발전하였다고 선전하기에 열중하였다. 그들은 '인천개항25년사'를 발간하고 '개항25주년 기념엽서'까지 발간하여 대대적으로 배포하였다. 인천 개항 50주년 때도 50주년 기념엽서를 발간하고, 경성방송국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특별방송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애초에 '인천개화박물관' 혹은 '최초사박물관'이라 했던 중구의 박물관 명칭이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명된 후, 최근에는 인천시 중구청이 앞장서 관내 북성동과 송월동을 합쳐 행정동 명칭을 '개항동(開港洞)'이라고 고쳤고, 인천시관광공사 등이 나서서 '인천 개항장 문화재 야행'이라는 정체 모를 축제를 매년 대대적으로 펼치는 등 목하 '개항(開港)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개항은 '인천국제공항'의 개항(開港)
누차 말해 온 바대로 1883년 인천 개항은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포함돼 외교가 판을 치던 해양 시대에 일본 강압에 못 이겨 항구 문을 연 굴욕적 역사의 한 대목이었다. 그를 어찌 지금에 와서 우리가 기리고 있는가?
인천의 '진정한 개항'은 20세기에 이루어졌다. 우주 항공 시대인 2001년, 우리는 인천에서 우리 힘으로 세계를 향해 하늘길을 열었다. 이는 시대에 걸맞은 능동적이자 역동적인 역사의 도약이라고 하겠다. 이 점을 기억하자.
300만 시민이 공동으로 수긍할 수 있는 오늘의 인천 상징물은 단연 '인천국제공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항공 약호인 'ICN'(영문자 Incheon에서 추출)은 인천 자산인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인천의 선전물과 다름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인천의 '국제화'는 바로 'ICN'을 진정한 '개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고 본다.
퇴영적인 '개항장 야행'이 아니라, 앞으로의 축제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을 기리는 국제 항공의 잔치가 돼야 할 것으로 본다. 세계 유수한 공항 도시와 연계한 '공항 축제' 등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2024.06.19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