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 빛을 잃은 태양, 일색무광(日色無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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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과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기까지 45년간 우리나라는 연이은 전쟁과 왕권 교체의 여파로 인한 내홍까지 악재가 겹치며 나라가 처참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옥좌에 오른 지 15년 만에 물러나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이 용상에 오르니 그가 곧 인조(仁祖)였다. 반정 다음 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 1587~1624)이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몽진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났고 10년 후에는 병자호란(1636~1637년)이 일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침의 태양처럼 힘차게 솟아오르는 청(淸)나라를 외면하고,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았던 명(明)나라에 매달리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구할 방도를 찾지 않고 현실감 없는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정묘와 병자, 두 번의 전쟁 사이 10년의 기간을 허송세월했다는 사실이다.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인조반정을 찬탈(簒奪)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인조로서는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무렵 명나라는 황제보다 더 큰 위세를 부리던 환관 위충현(魏忠賢, 1568~1627)과 그 무리의 전횡으로 나라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사정을 잘 아는 환관들은 위충헌에게 뇌물을 바치고 스스로 조선에 책봉사로 가길 청했고, 조선에 와서는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다. 은(銀) 수만 냥과 인삼 수백 근 정도를 가져가는 것은 상례였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조선을 찾은 환관 사신들 때문에 나라 살림이 거덜 날 판이었다. 이것은 인조가 나라보다 자신의 정권 안위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명의 칙서가 내리기 전까지는 인조를 부르는 명칭조차 서조선국사(署朝鮮國事)였다. 이 말은 조선의 임시관리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대(事大)가 굴종(屈從)이 되는 순간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 4월에 홍타이지가 청 태종으로 황제의 제위에 오르는 선포식에 참여한 조선의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1573~1640)과 회답사(回答使) 이확(李廓, 1590~1665)이 축하는 하지만 배례(拜禮)는 할 수 없다 하여 구타를 당하면서도 버텼다. 이는 조선이 청의 형제는 되지만, 신하가 될 수는 없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또한 이것은 10년 전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준(再造之恩) 명나라에 대한 의리이며 또한 청을 오랑캐라고 천대하던 의식이 내재한 결과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임금과 신하는 의리의 관계라 할 수 있어도 나라와 나라 사이는 의리가 아니라 이해관계라는 사실을 무시한 판단이었다.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사대(事大)가 외교가 아니라 굴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가 인종에게 보낸 국서를 휴대했지만 형식과 내용이 참람하였으므로 국경 근처에서 버리고 내용만 베껴서 귀국했다. 청 태종은 국서에서 대청황제(大淸皇帝)를 자칭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했다. 이는 전례(前例)를 위반한 것임에도 청 태종 앞에서 시비를 가리지 않고 받아왔다는 죄로 두 사람 모두 유배 길에 올랐다. 이들은 병자호란 뒤에 조정의 고위직으로 복귀하게 된다.
인조가 정치와 외교의 중심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조정은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로 분열되어 젊은 선비들은 대책도 없이 강경론만을 쏟아내는 사이, 민심도 점차 반조정으로 심화되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시절을 한탄하는 노래(상시가, 傷時歌)가 떠돌았다. 모든 것을 바로 세우겠다(反正)는 정책은 어디 가고 논공행상으로 밤새우고 재산분배와 벼슬자리 다툼으로 부패하니 백성의 생활은 전보다 더 어려워 광해군 시절과 인조 정권이 무엇이 다르냐고 한탄하면서 민심이 이반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국가의 명운보다 자신의 명운을 살피는 지도자
조선에서 온 사신들이 제위식에서 굽히지 않는 모양을 보고 홍타이지가 화가 나서 금년 모월 모일에 쳐들어가겠노라고 조선 사신에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설마설마하다가 금성철벽(金城鐵壁)이며 최후의 피난처인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기듯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는 1637년 1월30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수항단(受降檀)으로 올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다. 인조는 신료들과 온종일 무릎 꿇고 수항단에 머무르다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가 되어 홍타이지의 환도 명령이 있자 잠실벌을 지나 도성으로 돌아왔다. 길가에는 청군에게 잡혀있던 수많은 포로가 왕을 향해 울면서 “우리 임금이시어! 우리 임금이시어! 우리를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고 절규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도 청군 진영에 억류되었다. 지난날 인조는 모든 신하와 함께 초하루와 보름날에 명나라 궁궐을 향해 배례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지만, 나라가 망했는데도 명나라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인조는 점점 친청파가 되어가고 권력 유지에 온 정력을 쏟았다. 대책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바른말을 아끼지 않은 삼학사,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는 끌려간 끝에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다. 우리 백성이 10여만 명이나 포로가 되어 갔으나 압록강을 넘은 사람은 중국 땅에서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와도 잡아서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내야 했으며 돈을 주고 데려온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가 되어 도덕적 죄인으로 취급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했다.
홍타이지가 조선을 배려해 그나마 손을 묶고, 입에 옥구슬을 물고, 관을 등에 짊어지고 나아가는 함벽여츤(銜璧輿_)의 항복 의례를 면케 해준 것이나마 인조는 고맙게 생각했을까? 이것은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대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상징이었다. 입으로는 동맹이니 혈맹이니 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비밀정보국을 동원해 동맹국 정부의 기밀사항을 불법으로 도청하는 것이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이고 이것이 현실외교의 진면목이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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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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