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칼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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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여러분들과 몇 토막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국제사회는 온갖 미사여구로 인류와 사회의 안녕, 평화와 질서를 선언하지만, 동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 경제 그리고 안보를 벗어난 일을 해본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평화와 상호이해를 통한 인류화합의 상징인 유엔도 결국 열강들이 자기 세력과 진영을 위해 다투는 '무기 없는 전쟁터'란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 국민의 처절한 희생으로 시작되기에 이 전쟁은 어떠한 정당성도 없습니다.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내 삶의 터전을 잃고 내가 사는 마을이 파괴되고, 지하방공호에서 밤낮으로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절박함에 비한다면, 우방의 도움은 공허하고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방송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외국에서 지원하는 전차와 항공기, 미사일 등 무한경쟁의 무기보다 내 조국과 가족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국민의 용기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나는 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분들의 용기에 뜨거운 격려를 보내며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학생 여러분, 안락한 의자에 앉아 영상으로 강대국에 짓밟히는 우크라이나의 참혹한 현장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역사의 현장이며 국제관계의 첨예하고 깊고 검은 속내를 읽어내는 현실적인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생각과 행동을 가다듬을 것이고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기초를 쌓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어영부영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내 생각 내 삶대로 살지 못하고 탁류에 휘말려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 없는 스승 없고, 선생 없는 학생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스승을 찾아 나섰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스승이 학생을 기다려줍니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말고 많은 선생님 중에 어느 분이 진정 스승인 줄 느끼는 뜨거운 마음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면 주위에서 스승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자만하여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우물 속에 틀어박혀 하늘만 보고 자기가 제일인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공자 같은 스승이 있어 자공, 자로, 안회 같은 훌륭한 제자가 많이 나왔지만, 그 제자들 덕분에 공자의 말씀이 <논어(論語)>로 성립되어 오늘날까지 만인의 상식과 생활의 지침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임제의현(臨濟義玄)이란 분이 있습니다. 대단한 선승(禪僧)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참 스승인데, 한국에서 멀지 않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출신입니다. 이분 말씀 중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곳, 어느 처지에 다다르더라도 주관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여러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 사물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이쪽으로 쓸려가고, 누가 저렇게 말하면 또 저쪽으로 휩쓸려 이합집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따라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자신의 행동과 미래를 위해 차분하지만 힘있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적인 이익(私利)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참다운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심장을 떨리게 하는 개성과 감성 그리고 창조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좋은 선생님이 가르침과 독서에서 비롯되고 느낌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러 열정이 됩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책을 읽는 것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책이 봐져야 합니다. 책을 봐야지, 읽어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좋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기 쉽습니다. 어딜 가나 시간만 있으면 손에 책이 들려 있어야 하고, 책을 읽는 것은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생활에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과 함께 목적이 있어야 열정이 생기고, 그래야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봐야 할까요? 재미가 있어서 흥미가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그 책부터 보면 됩니다. 어려운 책과 씨름하는 것은 먼훗날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소설, 시, 미술, 역사 그리고 영화를 보면 됩니다. 그 어느 분야든 좋습니다. 영화가 책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는 영상으로 설명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시대입니다. 영화도 책처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림도 보지만 읽고 느낄 수 있어야 진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시험도 많아지고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하기 때문에 점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인천의 바다는 서해(西海)가 아니라 황해(黃海)입니다. 서해는 배를 타고 낚시하고 생활하는 연근해를 말하지만, 황해는 남북한 전체(22만㎢)보다 수백 배, 수천 배가 되는 넓은 바다이며 만국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북쪽 대륙과도 친밀하게 지내야 하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와 조화를 찾아내야 대륙과 해양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황해는 그 상징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이 맞닥뜨리는 분쟁지역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황해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동남아시아(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서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서아시아(사우디아라비아 등), 중앙아시아(실크로드와 주변 여러 국가)가 모두 아시아입니다. 황해는 이 많은 아시아의 중심 해양이며 우리는 이곳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는 치욕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는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랑스럽게 자신은 실패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허구이거나 자만심 그 자체일 뿐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까지 도전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이니까요. 다만, 실패의 아픔은 잊어버리더라도 그 속의 교훈만큼은 가슴속에 새겨두면 됩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생활 속의 자신감으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2022년 3월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여야 후보의 표차가 1%도 안 되는 0.73%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국민을 이끄는 여야보수정당이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은 현명해서 그분들에게 동일선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앞으로 그분들이 하기에 따라 새롭게 승패가 가려질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이것도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실감나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전환의 격동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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