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출석부
'전교생 51명' 야구부의 영화같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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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51명' 야구부의 영화같은 기적
원동중 야구부원들 |
“박 기자, 3월 21일에 약속 있습니까?”
2011년 3월 20일. 허구연 MBC SPORTS+ 해설위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네, 인터뷰가 하나 잡혀 있습니다.” 기자가 답했다.
“그래요? 중요한 인터뷰예요?”
수첩을 펼쳤다. 그리 중요한 인터뷰는 아니었다. 인터뷰이도 다음날로 연기를 바라던 차였다.
“아닙니다. 그런데 내일 무슨 일이라도…?” 이번엔 기자가 물었다.
“혹시 내일 시간 되면 나와 경남 양산에 다녀옵시다.” 허 위원은 그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경남 양산이라….’ 기자는 한참 동안 ‘양산’이란 단어를 옹알거렸다. 그도 그럴 게 양산은 야구와는 별 인연이 없는 지역이었다. 프로팀은 고사하고, 아마추어 야구팀도 없는 곳이었다. 특히나 바쁘기로 치자면 야구해설과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을 병행하는 허 위원이 기자보다 몇 배는 바쁜 터였다. 가뜩이나 허 위원은 그즈음 바쁜 스케줄을 쪼개 전국을 돌며 야구 인프라 확충을 위해 지자체장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다음날 KTX에서 허 위원을 만났을 때 그는 기자에게 두툼한 유인물을 건넸다. 유인물의 제목은 ‘경남 양산 원동중학교 야구부 창단’이었다. “이게 뭡니까?”하는 기자의 물음에 허 위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경남 양산에 원동중학교라는 시골 학교가 있어요. 전교생이 30명 남짓한 작은 학교인데, 학생 수가 감소해 2012년이면 전교생이 16명으로 줄거라고 합니다. 전교생이 20명 이하면 경남도 교육청의 방침에 따라 학교가 사라진다(폐교)고 해요. 학교가 없어지면 그나마 남은 아이들도 도시로 떠나고, 지역도 죽고, 지역민들의 추억도 사라질 게 분명해요.”
아쉬운 일이었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하지만, 도시 집중화와 출산율 저하로 원동중뿐만 아니라 많은 시골학교가 인근 학교와 통폐합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야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허 위원은 목소리 톤을 높여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폐교를 막을 방법이 있어요. 바로 야구부를 창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학교를 ‘야구 특성화 학교’로 만드는 겁니다. 시골 학교에 야구부가 생기면 ‘누가 그곳까지 찾아올까’ 싶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예요. 야구를 하고 싶은 아이들이 부산을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들 거예요. 가뜩이나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는 ‘야구 특성화 학교’로 지정받는다면 전국의 학부모들도 관심을 두고, 교육청의 지원 역시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타지의 학생들이 입학하면 원동중의 학생 수가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당도가 떨어진 딸기처럼 삶의 활력이 사라졌던 원동면
2011년 3월 원동중 야구부 창단식에 앞서 고사를 지내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경남 양산시 원동면 원동중을 찾았을 때 학교는 잔치 분위기였다. 주민들은 생업을 제치고 학교를 찾았고, 일부 주민은 풍물패를 조직해 야구부 창단식의 흥을 돋웠다. 지역 유지들과 시의원, 시 관계자, 교육청 인사들도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원동중을 찾았다. 푸른 토곡산과 배내골을 낀 원동중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현실은 엄혹했다. 먼저 원동중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었다. 주변 상황만 보면 원동중의 생존은 막막했다.
한때 매실을 비롯해 갖가지 토산물로 유명했던 원동면은 양산시가 커지면서 생기를 잃었다. 주민들 사이에선 '시내로 나가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원동면뿐만 아니라 양산시 전체가 농업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농업인구와 경작지 축소로 이어졌다. 여기다 4대강 사업은 결정타였다.
취재 중 학교에서 만난 한 주민은 “4대강 사업으로 고향의 특산물인 ‘원동 딸기’와 ‘원동 수박’이 사라질 판”이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동면은 낙동강변 사질토에 깨끗한 지하수가 흐르고, 일조량이 풍부해 딸기와 수박농사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곳으로 유명했다. 딸기 당도가 15.7브릭스로 높아 부산, 울산을 비롯해 수도권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전국 딸기 최대 재배지인 인근 밀양 삼랑진 딸기보다도 1kg당 1천 원 이상을 더 받았던 것도 맛과 품질이 뛰어난 까닭이었다. 덕분에 원동면 용당리 일대의 90여 농가에서만 연간 70, 80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강폭을 넓히면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변 일대의 딸기밭과 수박밭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지만, 더는 그들이 경작할 땅은 없었다. 생계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도시로 떠났고, 원동면은 더 고립된 섬이 됐다.
두 번째 엄혹한 현실은 ‘과연 전국의 학생선수들이 원동중을 찾아오겠느냐’는 불안감이었다. 부족한 학교 예산으로 숙소를 짓거나 구하는 건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월세 50만 원짜리 버스회사 숙소를 어렵게 구해 이를 야구부 숙소로 썼지만, 학교 안에 있는 다른 야구부 숙소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많았다. 아이를 시골 학교에 맡겨야 하는 학부모들 입장에선 찜찜한 대목이었다.
무엇보다 창단 중학교라, 실력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만약 몇 년이 지나도록 실력이 형편없다면 고교 야구부 진학률이 떨어지고, 이는 야구부 존립에 악영향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기사엔 원동중 야구부의 밝은 미래를 쓰긴 했으나, 기자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부질없는 꿈을 노래한 게 아닌가’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기자의 지인도 “야구는 ‘그깟 공놀이’일때가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며 “야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야구가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되리라 상상하는 건 무리한 기대”라고 꼬집었다.
아들 대신 시골 학교 감독을 맡은 아버지
원동중 야구부원이 맨땅의 야구장에서 투구하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우려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지난해까지 원동중은 최약체였다. 전국대회는 고사하고, 지역 공식경기에서도 창단 첫 승을 거두지 못했다. 신종세 원동중 감독은 “다른 팀과 붙었다 하면 콜드게임으로 지기 바빴다”며 “10점 차 이하로 지면 그나마 양반이었다”고 회상했다.
선수들의 실력향상도 답보 상태였다. 신 감독은 “부산, 울산지역 중학교에서 뛰던 학생선수들이 전학왔다. 지역 리틀야구부에서 뛰던 아이들도 원동중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좋은 선수들은 이미 다른 중학교에서 뛰는 통에 원동중으로 입학하거나 전학 온 학생선수들은 죄다 실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었다”며 “캐치볼을 할 줄 모르는 학생선수들도 태반이었다”고 털어놨다.
신 감독이 원동중 사령탑에 오른 덴 사연이 있었다. 지난해까지 원동중 감독은 신민기 씨였다.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신 씨는 아마추어 야구활성화를 위해 원동중 감독을 자원했다. 그러나 ‘초보감독’ 신 씨가 학부모들과의 이견으로 잠시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갑자기 감독 자리가 비게 됐다. 이때 신 씨와 학부모들 사이를 오가며 이견을 조율한 이가 바로 신 씨의 아버지인 신 감독이었다.
신 감독은 아마추어 야구계에 잔뼈가 굵은 지도자였다. 부산 대동중에서 20년 동안 감독을 맡아 이대호(오릭스)를 발굴했고, ‘야구 불모지’ 제주도로 건너가 리틀야구팀을 창단·지도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부산공고 감독으로 근무했다.
초임 지도자인 아들과 학부모 사이를 중재하던 신 감독을 보며 학부모들은 그에게 “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학부모들은 신 감독의 풍부한 아마추어 지도자 경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이유도 숨어 있었다. 시골 학교에서 감독을 하겠다고 지원한 이가 한 명도 없던 까닭이었다.
학부모 왕정인 씨는 “학교에서 신임 감독 공고를 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야구부 운영이 위기에 몰렸다”며 “그때 ‘큰 감독’님께서 흔쾌히 학부모들의 요청을 받아주셔서 어렵사리 신임 감독님으로 모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동중 학생선수들과 학부모들은 신 감독을 ‘큰 감독’으로 부른다.
‘연전연패’와 감독 문제로 벼랑 끝에 몰린 원동중 야구부는 신 감독이 팀을 맡으며 몰라보게 달라졌다. 오합지졸이었던 야구소년들은 어느덧 야구선수들로 거듭나고 있었다.
오합지졸은 어떻게 단련됐는가
원동중 야구부원들이 아침 보충수업을 받는 장면. 원동중은 학사관리가 철저한 학교다
원동중 야구부의 원칙은 학업과 야구를 병행하는 것이다. 학생선수라도 학업이 우선이고, 운동은 그 다음이다. 따라서 정규 수업이 끝나고서 훈련을 해야 한다. 이를 잘 아는 신 감독은 화려한 개인기보단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독려했다. 부족한 훈련량은 방학기간에 보충했고, 강도 높은 동계훈련으로 선수들의 체력을 강화시켰다. 학생선수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별이 뜰 때까지 운동장에 남아 훈련을 진행했다.
창단 당시 버스회사 숙소를 선수단 숙소로 사용했던 원동중 야구부는 지금은 학교 인근 다세대 주택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2013년의 새해가 밝았다. 공식경기 첫 승에 목말랐던 원동중은 1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주시장배 중학야구대회에 참가한다. 첫 경기 상대는 대구중. 원동중은 경기 초반까진 대구중을 앞섰으나, 뒷심부족으로 4대 7로 역전패했다. 눈앞의 첫 승을 놓친 학생선수들은 눈물을 삼켰고, 학부모들은 연방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 감독은 실망한 학생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력이 모자라서 지는 건 괜찮다. 그런데 노력이 부족하고, 의지가 모자라서 지면 그건 1패 아니라 2패다. 경기에서도 지는 거고, 인생에서도 지는 기다.”
그날 12명의 학생선수들은 머리를 밀었다. 그것이 그 또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다음날.
원동중은 서울 영동중과 맞붙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원동중 학생선수들은 질 때 지더라도 인생에서까지 지고 않았다. 그들은 정신없이 그라운드를 뛰었고, 어떻게 경기가 진행되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응시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구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했을 때 전광판엔 ‘12’와 ‘3’이 적혀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3’이 원동중의 스코어였을 게 분명했다.
“전해 12월에 눈이 억수로 많이 내렸다. 눈이 학교 운동장을 죄다 덮어서 애들이 훈련을 못할 정도였다. 영동중 경기가 끝나고, 겨울에 아이들이랑 눈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래서일까. 경기가 끝나고 그렇게 우리 아이들이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잘 교육받은 친구들을 상대로 12대 3 콜드게임으로 이겼으니까(웃음).”
눈이 내린 학교 운동장을 밟으며 아이들은 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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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만 해도 원동중의 기적은 ‘우연’의 다른 이름이었다. 중학야구계에선 “지역대회와 전국대회는 하늘과 땅 차이”라며 “원동중의 기적이 전국대회에서까지 이어지긴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7월 27일. 원동중은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제43회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에 참가한다. 대통령기대회는 시·도별 예선전을 거쳐 상위 1, 2위를 차지한 33개 팀이 참가하는 명실공히 전국 최고의 대회였다. 8개 팀이 참가해 자웅을 겨룬 경주시장배대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대회를 임하는 원동중 학생선수들의 자세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마음에 새기고 1회전 상대 포항제철중과 맞섰다.
야구 명문답게 포항제철중은 강했다. 원동중의 파생공세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되레 몇번이고 원동중이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원동중의 견고한 수비에 눌려 포항제철중은 좀체 점수를 내지 못했고, 결국 경기는 3대 2 원동중 승리로 끝났다. 16강전 상대였던 인천 재능중과의 경기에선 7대 0으로 원동중이 쉽게 승리했다. 8강전 부산 대천중과의 경기에서도 원동중은 4대 1로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창단 3년째의 시골학교가 전국대회 4강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원동중 학생선수들은 “내친 김에 결승에까지 오르자”고 다짐했고, 서울 양천중과의 4강전에서 2대 0 승리를 거두며 다짐을 현실화시켰다. 이제 결승이었다.
신 감독은 학생선수들을 불러놓고 ‘딱’ 한마디만 했다.
“여러분이 흘린 땀이 우리를 결승전으로 인도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땀의 대가를 바라고 뛰었다면 이젠 즐기면서 뛰자. 우승 부담을 덜고, 결승전만은 정말 야구를 즐기면서 뛰어보자.”
지역 회생의 롤모델이 된 원동중 야구부
아름다운 원동면의 전경. 낙동강과 매화의 조화가 한폭의 그림 같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원동중 야구부가 기적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경남의 ‘오지’로 불리는 원동면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양산시는 지난해부터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원동면에 ‘국토종주 자전거길 활용 체험프로그램’과 ‘단오제’, ‘매화축제’를 마련했다. 덕분에 양산은 알아도 원동은 잘 모르던 전국의 여행객들이 축제를 통해 원동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고 있다. 특히나 양산시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원동면 화제리에 임경대 유적지를 복원 작업하고 있는데, ‘양산 8경’의 하나인 낙동강변 ‘임경대’ 유적지가 관광 명소화한다면 지역 알리기와 지역경제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원동면은 16억 원을 들여 딸기, 미나리 재배하우스 건립 등 친환경 농촌시설 현대화사업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매진하고 있다. 그 덕분일까.
‘물 좋고, 인심은 좋으나 인구가 자꾸 줄던’ 원동면에 어느 때보다 사람꽃 향기가 진하게 퍼지고 있다.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었으나, 지난해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며 “되레 지역경제가 활성화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라고 밝혔다.
한 주민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원동중 야구부 창단 때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 동네 토박이들은 죄다 원동중 출신이다. 원동중에 대한 애잔한 추억이 억수로 많다. 2011년 원동중이 통폐합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 ‘이제 원동도 끝입갑네’하고 절망감을 느낀 사람이 많았다. 가뜩이나 지역경제도 갈수록 바닥을 쳐선지 고향을 떠나겠다는 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원동중에 야구부가 생기고, 타지 아이들이 하나 둘 전학 오면서 학교가 살아나고, 교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어른들도 원동중이 살아나는 걸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안 된다’고 포기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 돌파구가 생긴다는 걸 아이들을 통해 배웠다고나 할까. 농업에만 의존했던 원동면이 요즘 들어 관광 명승지로 탈바꿈하려 노력하는 것도 야구로 되살아난 원동중이 롤모델이 돼준 덕분이다.”
원동면뿐만 아니라 양산시 발전상황도 인상적이다. 나동연 양산시장 취임 이후 양산시는 활발한 기업유치를 통해 해마다 인구를 늘리고 있다. 현 추세라면 내년 말엔 ‘경제 자족도시’의 기준 인구인 3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 원동중 야구부의 기적만큼이나 지역도 기적을 향해 순항을 펼치고 있는 셈이었다.
원동중 기적은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기적’
결승전에서 원동중을 응원하는 학부모들과 주민들
8월 4일. 부산 구덕구장. 원동중은 부산 개성중과의 결승전에서 3회까지 3대 1로 앞서 나갔다. 신 감독은 내심 ‘사고를 쳐도 크게 치겠구나’하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4회 초 개성중에 2점을 내주고, 6회 다시 1점을 내주며 전세는 3대 4로 역전됐다. 6회 말 득점에 실패한 원동중은 7회 말, 단 한 번의 공격만을 남겨뒀다.
그즈음 허구연 MBC SPORTS+ 해설위원은 잠실구장에서 삼성-LG전의 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동중 야구부 창단을 물밑 지원하고, ‘야구 특성화 학교’ 아이디어를 직접 냈던 허 위원은 이미 원동중의 결승진출을 전해 들은 차였다. 결승전 소식이 궁금했던 허 위원은 해설준비를 하면서도 시선은 휴대전화에 뒀다. 하지만, 소식이 없었다. 허 위원은 ‘우승까지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7회 말. 선두타자 장대한이 삼진아웃으로 물러나며 신 감독은 입맛을 다셨다. 1점 차를 극복하려면 어떻게든 출루를 해야 했다. 이때 3번 김세빈이 볼넷으로 출루한다. 김세빈은 1아웃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도루를 기록하며 동점 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박웅의 안타가 터지며 원동중은 4대 4 동점을 만든다.
신 감독은 5번 왕재웅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한다. 상황을 2사 2루로 만들어 승부를 걸어볼 참이었다. 그러나 왕재웅의 희생번트가 실패하며 2루로 뛰던 1루 주자가 아쉽게도 죽고 만다. 이제 상황은 2사 1루. 동점까지 만든 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지만, 만약 연장전까지 간다면 원동중이 불리했다. 선발 김세빈은 7회까지 31타자를 상대로 115개의 투구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투구수도 많지만, 구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세빈의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신 감독은 6번 이지상이 타석에 들어서자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다. 이윽고 2볼 2스트라이크가 되자 신 감독은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히트 앤드 런’ 사인이었다.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 삼성-LG전을 중계하던 허 위원은 클리닝타임에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허 위원님. 기적이 연출됐습니다. 원동중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허 위원은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2011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시골학교 원동중을 찾아 물밑 지원을 아끼지 않던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해 했다. 허 위원은 환하게 웃으며 “9구단, 10구단 창단이 결정됐을 때보다 원동중 우승 소식에 더 감격했다”며 “중계 내내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신 감독의 ‘히트 앤드 런’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지상의 타구가 우익선상으로 빠르게 흐르며 1루 주자가 홈까지 파고든 것이었다. 원동중 학생선수들은 한꺼번에 몰려나와 홈을 밟은 박웅과 결승타 주인공 이지상과 얼싸안았고, 학부모들 역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학부모들은 “‘시골학교에서 무슨 야구냐’는 핀잔과 ‘시골학교 야구부에서 뛴다고 실력이 늘 것 같으냐’는 그간의 비아냥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며 “우리 아이들이 더없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고 말했다.
결승전이 끝난 직후, 전광판 |
원동중 우승은 야구가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기적이었다. 야구는 폐교 직전의 학교를 살렸고, 생기가 사라진 지역의 희망이 됐다. 무엇보다 야구와 헤어지기 일보 직전이던 야구소년들의 꿈을 되살려냈고, 지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허 위원은 “원동중의 기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기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원동중의 기적은 ‘민(民)·관(官)·학(學)’의 튼튼한 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먼저 ‘민’을 대표하는 지역주민과 동창회의 노력이 대단했다. 주민들은 야구부 창단 때부터 마치 자기 집 잔치를 벌이듯 발 벗고 나섰고, 야구부에 부족한 게 뭐가 있나 세심히 살폈다. 동창회에선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아 야구부에 전달했고, 끊임없는 관심으로 야구부을 지원했다.
‘관’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양산시장은 부족한 시예산을 쪼개 원동중 야구부 지원에 나섰고, 경남도 교육청에서도 원동중 야구부에 많은 신경을 썼다. 교육부 역시 농어촌교육 활성화 자금으로 경남도 교육청에 3억 원을 지원해 이 돈 가운데 상당액이 원동중을 비롯한 지역 학원야구부에 쓰이도록 배려했다. 만약 양산시와 도교육청, 교육부의 애정과 관심이 없었다면 원동중 야구부가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우승하긴 힘들었을 거다.
마지막으론 ‘학’이다. 야구부 창단을 이끈 김주만 전 교장에 이어 현 이규용 교장까지 원동중 선생님들은 학업과 야구를 병행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학생선수들이 마음껏 학교 운동장에서 뛸 수 있도록 여러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운동부가 있으면 일반 아이들의 면학분위기가 깨진다’고 우려하지만, 원동중에선 그런 소리가 일절 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선생님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덧붙여 허 위원은 “원동중의 준비된 기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말했다. 바로 “시골학교 원동중이 기적을 일궜으면 다른 학교에서도 기적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산 사직구장이나 창원 마산구장으로 TV 중계를 갈때마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한번씩 원동중을 들러 야구부의 애로사항이 없는지 경청했다 |
허 위원은 자신의 공로는 “쓸 필요가 없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그의 공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원동중 학생선수들이었다. 아이들은 우승이 확정되고서 허 위원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허 위원은 쏟아지는 문자메시지에 “정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연방 ‘허구연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아이들의 문자를 보고 또 보며 미소를 웃음꽃을 터트렸다.
원동중의 기적이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신 감독은 “중 3 졸업반 6명이 부산지역 고교 야구부로 진학하기로 결정됐다”며 “전국 각지에서 ‘아이를 원동중으로 보내고 싶다’는 문의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다”고 밝혔다.
원동중의 기적이 진정한 결실을 거두려면 양산지역 내 고교 야구부가 창단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계속 고향에 남아 야구의 꿈을 키울 수 있다. 양산시야구협회는 “올 11월 창단을 목표로 양산 내 한 고교와 야구부 창단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깟 공놀이’에 불과한 야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 원동중 야구부 창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허구연 해설위원은 “프로야구가 대도시에서만 경기가 펼쳐진다고 아마추어 야구까지 대도시에만 활성화돼선 안 된다”며 “울릉도에서도 아마추어 팀이 생겨야 야구가 진정한 국민스포츠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즌 중에도 야구 인프라 확충과 아마추어 야구팀 창단을 전국을 뛰어다닐 예정이다.
원동중 야구부 창단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박말태 양산시의원(새누리, 물금·원동)은 ‘친환경 농산물’을 통한 지역주민 소득 증대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박 의원과 함께 원동중 야구부 창단을 위해 고군분투한 최영호(새누리, 상·하북) 시의원도 지역 초교 학습환경 개선과 농수로 개선사업 등 ‘민생’에 올인하고 있다.
원동중 야구부 창단을 이끈 김주만 전 교장은 양산교육지원청 과장으로 승진했고, 이갑수 원동면 면장은 현재 양산시 농정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양산시 야구발전에 누구보다 헌신적이던 박치병 양산시야구협회장은 협회장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하고 있다.
한때 아버지에게 지휘봉을 맡겼던 신민기 씨는 다시 원동중 감독으로 돌아왔다. 이번 대회에선 코치로 활약했다. 선수들은 신종세 감독을 '큰 감독'으로, 신민기 감독을 '작은 감독'으로 부른다.
2011년 3월 전교생이 25명으로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원동중은 현재 51명으로 학생수가 늘었다.
2010년 3월 원동중 체육교사로 부임해 체육시간마다 아이들에게 야구규칙을 가르치고, 야구를 직접 경험하도록 배려했던 최윤현 교사는 여전히 원동중에서 교사로 근무 중이다.
지금도 원동중 아이들은 매화보다 하얀 야구공을 던지며 꿈을 키우고 있다.
2011년 3월 30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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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주님의 댓글
성실! 감동적인데요..^^
류정건님의 댓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 받았습니다.과거 전라도 낙도 사치분교 농구선수("섬 개구리만세 영화")들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