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출석부
강화도 3․1운동과 청년운동 지도자 - 조구원 趙龜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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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원 趙龜元 I1897~ ? 이름 13포인트굴림체 진하게/생몰년 안 진하게
통산 16회 인상 4회 졸업기수 12포인트 굴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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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443번지에서 출생하여 강화 보창학교(普昌學校)를 다니고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보창학교는 강화진위대장을 지낸 이동휘(李東揮) 참령이 설립한 사립학교로서 애국심을 강렬하게 교육한 학교였다. 이동휘는 1904년 8월 강화도에 육영학교(育英學校)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였다. 1905년 5월에 육영학교를 보창학교로 개명했다. 이 학교 위치는 현재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의 강화농협 건물이 선 곳이었다.
이 학교 개교 초기과정이 2년이었으므로 조구원은 이 학교를 마치고 4년제 강화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강화초등학교에 보존 중인 졸업대장에는 ‘증서번호 32, 4회 16세 명치 45년 3월 25일 졸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치 45년은 1911년이다. 성적은 총 19명 중 1위였다.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으로서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1959년 간첩죄로 법살당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 동기생이었다. 조봉암은 성적서열이 10위로 올려져 있다. 여러 독립운동 관련 관헌기록에 조구원은 조봉암을, 조봉암은 조구원을 친구로 진술한 것들이 남아 있다.
조구원은 1916년 3월 22일 인상을 졸업하고 판임관(判任官) 견습시험에 합격해 하급관리의 길을 선택했다. 소정 연수교육을 수료하고 1917년 4월 경상북도 판임관 견습으로 발령받아 일했다. 그러다가 경상북도 상주군 금융조합 서기로 몇 달 일하고 다시 그만두었다. 애국심이 강한 그로서는 동포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그는 고향 강화에 돌아와 있었다. 강화읍의 잠두교회가 설립한 합일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3월 초, 경성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소식은 시시각각으로 강화로 전해졌다. 개성에서 3월 3일에서 7일까지 만세시위가 벌어졌으며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오자 강화의 지역유지와 교회 지도자들은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대표적 인물이 강화진위대 출신 유봉진(劉鳳鎭)이었다.
3월 18일, 조구원은 강화 장터에서 벌어진 6,000명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다음날 인천경찰서로부터 경찰병력, 경성으로부터 군대병력이 증강되어 왔고 곧바로 검거바람이 불어 닥쳤다. 43명이나 되는 지도자들이 체포당했다. 청년들도 붙잡혀갔다. 조구원은 주도자가 아니어서 체포를 면했다.
강화경찰서가 체포된 사람들한테 무자비한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모두 체포된 강화는 다시는 시위를 벌이지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끈질긴 저항정신이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
조구원은 지하신문『자유민보』를 제작 복사해 돌리고, 고제몽(高濟夢) · 오영섭(吳永燮) 등과‘제2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필사해 돌리고 강화경찰서장과 군수, 친일 경찰 간부에게 익명으로 경고문을 발송했다. 조구원이 담당한 것은 강화경찰서 조선인 간부 이해룡 경부에게 ‘동포로서 일본의 사냥개 노릇 하지 말고 만세운동의 대열로 오라’는 것이었다. 다시 검거 바람이 몰아치고 조구원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투쟁을 계속하려던 구연준(具然濬)·김한영(金翰永)·김영희(金永禧)·주창일(朱昌日)·조봉암 등도 체포당했다. 조구원과 동지들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력으로 석모도, 교동도, 볼음도 등 부속도서로 만세 시위가 확대되었다.
조구원과 동지들은 강화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월초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 사건은 「강경사(江警司) 제33호 조구원 외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피고사건」이다. 『매일신보』기사에 의하면 1919년 5월 6일 ‘신문리 야소교(耶蘇敎) 학교 교사’인 그는 ‘강화군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린 혐의’로 이 날 구연제·김영희·오영섭·고제몽·김한영·주창일·조봉암 등과 함께 강화경찰서에서 경성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경찰 문서 제목에도 그의 이름이 대표로 들어갔고 이 신문기사와 판결문에도 그의 이름이 선두에 나온다. 그가 강화에서 만세시위를 다시 일어나게 투쟁한 중심인물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고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매를 맞고 반 주검이 되어 풀려났다. 그 후 고향에서 몸을 회복하고 세창양행(世昌洋行) 경성사무소에 취업해 일했다. 세창양행은 개항기인 1884년 독일의 마이어(Meyer) 상사가 인천에 지점을 내며 설립한 무역회사였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자리가 세창앙행 사옥이 있던 곳임은 알려진 사실이다. 세창양향은 일제강점기에도 사업을 계속하였고 조구원은 서울사무소에서 1년 가량 일했다.
그는 1920년 다시 고향 강화로 돌아가 잠두교회(蠶頭敎會 현 강화중앙교회)의 엡웟청년회 간사를 맡고 합일학교(合一學校) 교원으로 일했다. 엡웟청년회는 1899년 미국에서 조직된 감리교 청년봉사단체로 원명은 The Epworth League. 한국은 1897년 미국인 선교사 존스 목사의 지도로 서울 정동교회에서, 190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조직되어 전도와 애국계몽에 앞장섰다. 인천 내리교회와 밀접히 교류하던 강화 잠두교회에서도 1910년대에 결성되었다. 합일학교는 1901년 4월 1일 존스 목사와 강화 잠두교회의 박능일(朴能一) 목사가 선교와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취지에서 설립한 잠두의숙(蠶頭義塾)이 교명을 바꾼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공립에 흡수되어 지금은 합일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조구원은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4월 강화』라는 지하신문을 제작해 청년들에게 돌렸으나 3·〮1 만세 때처럼 독립정신, 애국정신을 표면화하지는 못했다. 1921년 잠두교회에서 열린 ‘가정평화를 유지함은 남자나 여자냐’ 라는 주제의 계몽강연에 나간 기록이 있고 1923년 1월에는 민립(民立)대학 설립운동에 강화도를 대표하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강화지국을 설치하면서 강화주재 기자로 일했다. 국가보훈처는 그가 1928년 12월 <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 0pt; font-family: 바탕체; font-size: 11pt; mso-ascii-font-family: 바탕체; ms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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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창회장님의 댓글
실로 놀랍습니다. 조구연 선배님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기록을 조사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을텐데요... 다시한번 이원규 선배님을 비롯한 편찬위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총동창회장님의 댓글
선배님들이 자랑스럽고, 편찬위원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향후 인천고등학교의 자랑스러운 전통이 굳건하게 이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