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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고토(故土) 수복을 위하여 -퍼온 글-
작성자 : 안태문
작성일 : 2005.09.12 00:35
조회수 : 1,680
본문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이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이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어떻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을까.
우선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그 시기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톈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 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ㆍ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알아보자.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이다.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다. 그런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어떻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을까.
우선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그 시기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톈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 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ㆍ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알아보자.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이다.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다. 그런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
<윤내현 단국대 부총장 겸 사학과 교수 제공>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이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는 상태다.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참고) 이 글은 '단군과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다'사이트에서 퍼 온것입니다. 이 사이트 주소는 다음과 같으며 많이들 방문하셔서 올바른 역사관 확립의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http://www.dangoon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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