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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웠던 겨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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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웠던 겨울의 추억
내가 고등학교 입시를 치른 1963년 초의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로 기억된다.
인천항구가 꽁꽁 얼었으니 말이다.
내가 인천항이 개항 80년 만에 결빙됐다는 소식은 알게 된 것은 신문의 뉴스기사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오직 기사뿐인 그 소식을 접하고 나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기야 지난 보름동안은 한낮의 최고 기온이 거의 영하 십도정도였었다는 것을 곰곰이 따져 기억해내고 보니 사실 근년에 그런 추위도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바다가 얼어?”
호기심이 나니 참을 수가 없어 얼어있다는 그 바다를 보러 나는 홀로 그 추운 한낮 인적도 거의 없는 자유공원의 팔각정을 찾았다.
팔각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니 과연 보이는 모든 바다가 얼어있었는데 그 광경은 장관이었다.
월미도와 축항 사이의 내항은 물론 작약도너머 영종도까지의 외항도 얼어있었다.
몇 척의 외항선이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의 얼음바다위에 정박해 있었는데 내항이나 외항 그 어디서나 어떤 움직임도 볼 수없는 고요만이 인천 항구에 쌓여 있었다.
내항 한 복판으로는 큰 배가 지나간 흔적으로 깨진 얼음이 다시 얼어 있었는데 아마 당시 가끔 축항에 정박하는 미군 보급선이 얼음을 헤치고 출항했던 자취로 보였다.
먼 바다의 눈이 쌓이지 아니한 얼음은 푸른색을 띠는데 유빙(한강얼음이 풀려 바다로 밀려온 유빙), 즉 성애라고 하는 하얀 얼음덩어리도 군데군데 보였다. 나는 그 추위에도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을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공원을 다녀온 며칠 후 끊겼던 강화행 뱃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배 시간에 맞추어 인천 부두에서 아버지와 함께 강화행 여객선을 타게 되었다.
아침 일찍 부두에 도착하여 가까이서 얼어있는 바다의 그 모습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깨졌다가 다시 얼어붙은 얼음조각들을 보아 얼음두께는 적어도 한 뼘보다 두꺼워보였다.
당시 인천에서는 황보호라는 이름의 목제 기선이 인천에서 강화 남단의 초지를 거쳐 갑곳까지 운항되고 있었는데 황보호는 승객을 삼백 명 가까이 태울 수 있는 인천 부두에서는 제법 큰 여객선이었다.
출항을 위하여 엔진을 달구고 있는 배안에는 많은 승객이 선실을 메우고 있었는데 얼음바다에 관심이 많은 나는 선실 밖으로 나와 배가 항구를 떠날 때부터 목적지 초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내내 갑판에서 모든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사방으로 빈틈없이 얼어붙은 배가 과연 어떻게 움직일 수 있으며 안전하게 항해하여 목적지인 초지까지 갈 것인가.......”
“가까이서 보게 될 언 바다의 언 모습은 어떨까.”
드디어 엔진이 걸리고 스크루가 돌기 시작하니 처음 깨지기 시작한 얼음은 스크루가 돌고 있는 배 뒤쪽의 얼음이었다. 잠시 후 스크루가 전진 후퇴의 작동을 몇 번 반복하니 황보호는 옆에 얼음이 잔뜩 붙어있는 체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는 힘겹게 얼음판을 헤집어가며 서서히 내항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얼음 두께는 어림잡아 한 뼘 내외다. 어느 정도 지나니 배 옆에 붙어있던 얼음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소월미도를 돌아 외항으로 나와 작약도 쪽으로 향하면서부터는 얼음 두께도 조금 얇아져 배는 조금 더 속도를 올리기 시작 했지만 평소의 속도보다는 차이가 나게 느린 속도였다.
바다는 깨끗하게 얼어붙은 호수처럼 반 뼘 정도의 판판한 얼음판으로 덮여 있었다.
얼음 두께가 얇아지고 배의 속도가 오르고 나니 뱃전의 얼음이 깨어지면서 그 조각들이 빙판 좌우로 튀기 시작하는데 멀리 튀는 것은 제법 멀리 미끄러져 나간다.
배가 지나가면서 얼음판도 흔들렸다. 뒤편의 얼음바다는 평소 배지나가는 물결모양대로 출렁거렸다.
가끔 피할 수 없는 유빙이 배 앞에 나타나면 황보호는 스크루를 멈추어 속도를 줄여 그 유빙을 천천히 밀어낸다. 유빙이 배와 부딪치는 순간은 배가 약간 흔들려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충격을 전해왔다.
또 배 옆의 다른 유빙들은 배가 지나는 물결에 부딪쳐도 처음에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나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뒷 물결에 서너 번 더 부딪치고 나면 그때부터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하여 멀리 보이지 않을 때 까지 황보호에게 계속해서 작별의 손을 흔든다.
바닷가 개펄에 얹혀있는 유빙들의 크기는 작은 것은 지프차 크기요 큰 것은 트럭이상의 크기인데 그 유빙이 바다위에 뜨게 되면 일부만 보여 그 큰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평소 시간 반이면 도착 할 수 있는 뱃길을 황보호는 한 시간은 더 지체하여 초지 뱃터에 도착했던 것 같다.
며칠 후 초지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 탄 여객선은 같은 동양기선소속의 갑제호라는 여객선이었다.
갑제호는 백여 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던, 그러니까 황보호보다는 작은 기선이었으나 당시 인천에서는 귀한 철선이었고 그 모양도 황보호보다는 날렵했다. 갑제호는 철선임을 과시하는 듯 웬만한 유빙은 속도조절도 없이 그대로 부딪치며 헤쳐 나갔다.
돌아올 때는 아버지가 강화에 계속 남아있는 관계로 혼자 배에 올랐는데 강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선실 밖에서 얼음바다를 구경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 갑제호가 며칠 후인 2월 6일에 큰일을 내고 말았다.
며칠 후 한동안 끊겼던 교동도행 뱃길이 열려 갑제호가 그동안 밀린 승객으로 정원을 초과한 상태로 인천항을 출항해서 강화를 향하여 항해하다가 얼음에 배 앞부분이 깨져 승객 중 서너 명이 사망하는 침몰사고를 내고야 만 것이다.
갑제호가 침몰한 사건은 당시에도 특종이었다. 다음날엔가는 바닷가 개벌에 누어있는 갑제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으며 며칠 동안 관련된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나는 이 사건의 내용도 물론 당시의 신문과 라디오 뉴스를 통하여 알게 됐지만 당시 그 배를 탔던 내 친구 인환이의 이야기를 통해 이 일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해 인천고등학교입시에 합격한 교동중학교 출신인 인환이는 뱃길이 끊겨 인천에 머물다가 뱃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과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 갑제호에 올랐단다.
워낙 손님이 많아 선실이 복잡하여 그 친구 인환이는 다른 친구와 둘이 배 앞의 갑판에서 바다구경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 자리는 내가 며칠 전 초지에서 인천 올 때 얼음바다를 구경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날은 바다에 유빙이 많아 갑제호는 평소의 항로보다 먼 거리로 돌아 첫 기항지인 장봉도에 승객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손님을 내리고 후진하던 뱃머리로 많은 유빙이 밀려있었는데 그중 제법 큰 유빙이 있었다고.......
배가 다시 방향을 틀면서 전진하면서 몰려있는 유빙더미를 헤쳐 나가는데 그 제법 큰 유빙은 배에 부딪친 후 왼쪽으로 밀렸을 거라고 둘이는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잠시 후 선원이 와서 배가 파선됐다고 하면서 상갑판으로 올라가라 해서 상갑판에 오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했다.
유빙에 부딪쳐 깨진 앞 선실 왼쪽부터 바닷물이 배안으로 밀려들어 배가 물에 차기 시작하니 혼비백산한 승객들은 거의 젖은 상태로 상갑판으로 몰려들었고 재빠른 승객 몇은 유빙에 올랐단다.
와중에 배 엔진이 꺼졌는데 마침 비번중인 베타랑 기관장이 식구와 함께 집이 있는 교동으로 가느라 배에 있어 그 기관장이 물 차 오르는 기관실에서 꺼진 엔진을 다시 살려 배를 갯가로 밀어 댄 덕분에 배가 바다 속에 가라앉는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그 사고의 사망자 중 세 명이 그 기관장의 식구였다. 워낙 승객이 많아 복잡해서 그 기관장은 특별히 구석지고 편안한 곳에 아내와 자식들을 있게 했는데 사고 당시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구조된 승객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후 그제야 가족이 모두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 기관장이 소동을 부렸다는 기사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당시는 자초지종을 몰랐다.
갑제호 침몰사건으로 나중에 선장과 동양기선의 여러 관계자가 실형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그 기관장은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고 그 후 그 기관장이 새 장가 들 때 인천시장이 주례를 섰다는 사실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이후 사십여 년이 지났어도 그때처럼 인천항이 다시 언 적이 없다.
강화바다 앞의 유빙(성애)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유빙이 사라진 이유로는 온난화나 도시화의 영향도 있지만 그 보다도 한강에 생겨난 각종 담수 댐의 저장된 물의 수온이 겨울에 덜 식기 때문으로 그로 인하여 그 옛날 한강의 두꺼운 겨울철 얼음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한다.
요사이 인천항이 얼어버린다면 그런 특종이 없겠으나 부동항인 인천 항구가 개항 80년 만에 한참동안이나 결빙된 1963년의 그 당시의 기록은 거의 찾기 힘든 것 같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아 그때 그랬었나 아 그랬었지.’ 들 하며 다시 그 멀지도 않는 옛 일을 거의 잊고들 산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먼 이야기도 아니지만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인천의 옛이야기 중 하나다.
댓글목록 0
劉載峻님의 댓글
지근 거리의 후배는 게재 글에 다시 매료 됩니다 갑제호 철선 승선 경험은 없어도 익히 기억되는 여객선이죠 집이 강화 읍이어 승선 기회는 없었지만, 늘 선교 사목으로 교동면, 삼산면 섬으로 강 추위 무 더위 무관하게 다니는 아버지의 승선으로 초미의 가정사중 하나였죠 정겨운 추억의 영상 입니다 감사 합니다
석광익님의 댓글
강화도는 연전에 한국 갔을때 첨으로 잠깐 들러 보았었어요. 스물이 넘도록 한국에 사는 동안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네요. 그런데 선배님 글 읽으면서 그리고 우리 동기 윤용혁이의 글을 읽으면서 다음에 한국가면 꼭 강화도엘 가 봐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것이 생깁니다. ㅎㅎㅎ 유선배님 인사 올립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갑제호 사고는 참으로 안타까운 제가 어릴 적 강화에서 어른들에게서 들었지요.똑딱선이라고 까만 연기를 뿜으며 건평과 가끔 외포리 앞바다를 지나는 것을 보았지요.대단하신 기억력으로 추억을 어루만지셨군요.효철형님,광익이는 제 동기로서 지금 캐나다에서 멋지게 사는 친구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