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인천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본문
인천에서 걸어서 강화까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963년 2월 얼어붙은 인천바다를 항해하던 갑제호가 침몰사고를 낸 후 여객선출항허가가 까다로워지니 배를 타고 강화 가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하루는 강화의 작은아버지 댁에 갈 일이 생겨 아침 일찍 뱃 시간에 맞춰 전동 집을 떠나 홍여문을 지나서 거의 여객선 부두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오늘 배가 못 뜬다며 돌아오는 여러 사람 중에 있던 고향 선배 한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선배는 동인천역에 가서 대명리행 버스를 타고 가서 대명나루에서 바다를 건너 강화로 가겠다는 생각이라 하기에 나도 그 선배와 동행하기로 했다.
당시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버스도 출발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60년대 초는 강화 다니는 교통편도 일제 때부터 시작된 바닷길 중심에서 서서히 버스로 바뀌던 시절이라 나도 동인천역에서 출발해서 부평, 김포읍을 지나 갑곳나루를 건너는 강화행 버스로 고향을 다녀온 적이 몇 번은 있었다. 그러나 대명리 길은 초행이었다.
동인천역에 도착하니 대명리행 버스 한편이 결행이라 다음 버스는 오전 늦게 출발할 거라는데 마침 백석행 시내버스가 곧 출발예정이어서 차비도 절약할 겸 백석행 시내버스에 둘이 올랐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은 시외버스에 비하여 상당히 쌌다.
그리고 개 건너로 왕래하는 백석행 시내버스는 하루에 서너 번 정도로 매우 드물었을 적이라 때마침 출발하는 백석행 시내버스가 매우 반가웠다.
종점 백석에서 내린 둘은 대명리행 버스가 오면 세워서 타기로 하고 대명리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포장인 신작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면서 버스 오기를 기다렸지만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길에는 거의 다니는 사람도 드물었으며 더구나 차량의 통행은 더 없었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본격적으로 비포장인 자갈길을 따라 걷기를 계속했다.
고향 선배는 아버지가 교편 잡고 있는 중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의 제자로 스승의 아들인 나에게 종일 친절하게 대해줬다.
한참을 걷다보니 오르기에 숨이 약간 찰 정도의 제법 긴 언덕길이 나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무네미고개라는 고개였다.
두어 시간 정도 걸어 양곡의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했는데도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류장에서는 몇몇 사람이 오는 버스 가는 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린다고 했다.
시간도 한낮이고 허기도 진지라 선배와 나는 정류장 부근의 음식점에서 국밥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식사 후에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또 언제 버스가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둘은 다시 대명리쪽을 향해 계속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아마 강화 집까지 걸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거의 반시간 이상 걸었을 때 뒤쪽에서 차오는 소리가 나 돌아보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야속한 대명리행 버스다.
그래도 반가워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워 타고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두어 대의 버스가 결행됐었지만 버스의 승객은 좌석이 한두 자리 남을 정도였다. 버스는 곧 종점인 대명리에 도착했는데 그나마 그 버스가 없었다면 한 시간 정도는 더 걸어야 했을 것이다.
대명리에는 성애가 가득 찬 바다를 건네주는 통통 나룻배가 있었다. 아직 추위가 덜 풀려 바다에는 얼음이 가득했으나 하루에 서너 번 물때를 맞춰 나룻배가 왕복한단다. 버스의 대부분 승객은 강화로 대명나루를 건너는 손님이라 통통 나룻배는 곧 바다를 건넜는데 건너편인 초지 나루에 내리니 해가 제법 기운 후였다.
오늘아침 인천에서 배가 떠났다면 오전에 도착했을 곳을 서너 시간 뒤에야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여기부터는 어렸을 적부터 인천 다녀올 때 자주 다녀서 눈에 익은 길이다.
작은아버지 댁이 있는 산문 부락까지는 온수리를 거쳐 길정리를 지나 진강산과 덕정산 사이의 불의리고개를 넘는 삼십리 길이지만 혼자서도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그날은 길정리에서 도장리를 지나 조산리의 외가에 들러 심부름이 한 후 고향집으로 가야 하므로 평소보다 십리 정도는 더 가야만 했다.
고향선배와는 이십 리 정도의 길을 계속 같이 더 걸어서 외가가 있는 조산에서 헤어졌는데 선배의 집는 그곳에서 십여 분 거리였다.
외가에서 외삼촌댁을 뵙고 심부름을 전하면서 인천부터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외삼촌댁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심부름에 너무 고생했다고 하신다. 산문부락에 있는 집에 전해야 할 또 다른 일도 있어 인천을 출발했다고 말씀드리고 곧바로 외가를 나설 때는 해가 거의 서산에 기운 뒤였으며 시오리 길을 더 걸어 산문 부락의 집에 이르니 저녁식사가 끝난 지 한 참 뒤여서 내 저녁은 새로 차려야 했었다. 작은 아버지가 부탁해서 인천에서 준비해 간 아카시아나무 벨 때 사용할 가죽 장갑 한 켤레를 작은 아버지께 내어드리니 이것 때문에 조카가 수고 많이 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작은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외가댁의 심부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저 그런 심부름이었지 그 큰 고생까지 각오해야 하는 급박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새라면 전화 혹은 핸드폰 한 통화면 족한 전갈이었다.
하여간에 그때야 웬만한 시골 길은 거의 걸어서 다닐 때라 이삼십 리 길 걷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예정도 없이 하루에 거의 팔십 리 길 그러니까 30키로 정도를 종일 걷게 된 그 겨울날의 경험이야말로 나에게는 생전 처음해본 그리고 그래서 결코 잊지 못할 일 중의 하나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지금야 그런 일로 그렇게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일도 없거니와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어도 옛 그 길은 수많은 차량이 붐비는 길로 바뀌었고 주변도 복잡해져 이미 걸어서 다닐 길이 아니다.
그 후에도 걷는 것이 내 팔자인지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병 소위로 임관됐다.
광주보병학교의 십팔 주간 기초 군사훈련과정부터 걷기를 밥 먹기처럼 하기 시작해 18개월간의 소대장시절을 통하여 최고로는 하루에 백리 길 완전군장으로 강행군하는 등, 수없이 걸어야만 하는 보병장교로 군대 시절을 이년 사개월간 보냈고 제대한 후에도 어느 해에는 동원 훈련에서까지 보너스로 백리 행군 경험을 했는데 그래도 내 생전에 걸었던 여러 경험 중의 으뜸은 그해 김포 대명을 거쳐 고향 집까지 걸었던 그 추억이다.
요즘은 오히려 건강이나 취미로 걷기를 즐기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으며 집에서나 스포츠센터 등에서 러닝머신으로 운동하는 것이 일반화됐으니 이제는 걷기가 생활의 일부였던 옛날과는 우리의 형편이 무척이나 달라졌다.
요즘 국토 순례라 하여 먼 길 걷는 행사를 보게 되는데 특히 강화도는 국토 순례길 중에도 으뜸으로 대접받는 모양이다. 그런데 작년도였나. 외가가 있는 조산리 앞길, 그러니까 사십여 년 전 그 겨울 내가 걷던 그 길에서 국토 순례행사 중이던 여러 명의 초등학생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은 마음 놓고 걷기도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구나 라고 생각하니 가난에 찌들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아니하여 어느 세상에 걷지 않고 먼 곳까지 버스타고 편하게 다니는 세월이 올까하고 푸념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지기까지도 한다.
한 동안은 오른 쪽 무릎의 관절에 이상이 생겨 가끔 고교 동창들과 함께 하던 등산도 끊었다가 무릎이 많이 좋아져 이달 초 이년 만에 동창 등산모임에 나가 청계산을 다녀오니 그 동안 못 보던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나 매우 반가웠고 즐거웠는데 그보다도 앞으로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한 것이 더 좋았다.
언제 누군가 마음 맞는 이와 동행이 되어 반나절 아니면 종일 적당한 시골길을 찾아서 옛날처럼 걸어나 볼까.
(2008년 10월 22일 동탄면 목리에서)
댓글목록 0
이기호님의 댓글
이효철 선배님, 글 잘 읽었읍니다.강화가 좋아서 선두리에 조그만 시골집을사서 자주 다녔기 때문에 모든지명이 익숙한 터라, 아주 흐뭇하게 읽었읍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석광익님의 댓글
반세기 가까운 세월 전의 일들을 마치 지난주 있었던 일처럼 상세하게 기억 하시는 선배님의 기억력이 놀랍습니다. 어찌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법한 평범한 일상을 아주 재미있는 글로 풀어 나가시는 필력에도 감탄입니다. 다음에 한국가면 선배님과 함께 시골길 걸으며 옛날얘기 들을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
李淳根님의 댓글
어느해엔가 삶에 지쳐서 수 백번이나 죽음을 생각하면서, 추운 겨울날 하인천역에서 백마장까지 힘없이 걸어던 기억이 새롭게 생각이 납니다.
劉載峻님의 댓글
이 효철 선배님 게재 글 제목이 제가 경험한 내용이어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고 1 봄 어느 주말에 전동 23번지 집을 떠나 강화읍 관청리 250번지 본가를 향해 출발해 흙먼지 풀풀 대는 길을 혼자 걸어 드디어 갑곶 항이 빤히 보이는 김포 쪽 선착장 그러나 배가 끊겨 불가피 지서 (지금의 파출소)문을 두드러 하루 밤 노숙을 면하고 지서장님 배려로 자택에 까지 따라 가 흰 쌀은 거의 없는 보리 밥 한그릇에 반찬은 미지근한 물에 식초 조차 넣지 않은 물른 오이지 단 한가지 그래도 지서장님은 도시 도령 ? 이 이거 입에 맞나 인간미 넘치는 배려를 해 주시는 가운데 평소 벌레 들어갔다며 멀리 했던 그 보리 밥을 뚝딱 해채워 지서장님의 배려에 화답을 했죠 선배님 게재 글 참으로 정겨운 내용에 훈훈한 선배님 인품이 물씬 풍깁니다 사랑 합니다 박 창섭 형이 동네 형이었고, 제 형인 유 재식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죠
劉載峻님의 댓글
기호, 반갑구나 Canada Prime minister ? ㅎㅎ John 석 광익 동문 반가워요 인사동 회장님 반갑습니다 이 선배님 위의 창섭이 형은 65회 동기 이십니다
이효철님의 댓글
유재준 후배는 매우 가까운 곳에 살던 후배시군요. 내 전동집 주소는 16번지로 해군병원 아래 여고 후문 맞은 편이었고 대학 시절부터 한참은 관청리 262번지로 강화초등학교 뒤편에 살았습니다. 그런 인연이 이렇게 확인되니 반갑습니다.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호,석광익, 이순근후배 댓글도 감사합니다.
劉載峻님의 댓글
제물포고 바로 아래 길 건너 번지가 23번지 이었고 관청리 소재 강화 성공회 본당 신부로 아버지가 당시 사목 했습니다 관청리 262번지 경우 인근에 이 선배님과 동기되는 송 재욱 형 댁의 과수원도 있었죠 정겨운 고향 향수에 풍요로운 가을이 함께 합니다 별도 이 메일 올렸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효철형님,지금의 국토대장정을 일찌기 도전하신 멋진 모습이십니다.인천서 강화까지 정말 대단하시군요.추억이 서린 좋은 글에 마음을 두렵니다.재준형님,효철형님은 인고가 나은 수재로 저의 고향 강화 살미골의 전설이세요.
이렇게 두분을 대하니 너무나 좋습니다.이것이 인고인의 전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