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 - TV와 골목대장
본문
벌써 새해도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간담을 서늘케 합니다.
때때로 세상이 점점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정보혁명이라는 물결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정보
앞에 소화 불량을 느낄 정도입니다. 과연 어느 게 진짜
정보인지 판단조차 쉽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또, 수많은
정보 속에 쓰레기 같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도 부지기수
이겠지만...... 너도나도 표현의 욕구를 위해 문자, 영상,
메세지를 통해 마구 쏟아내고는 책임를 지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세태입니다.
이러매 불신이 팽배하고 세상이 점점 낯설어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덥고 하는 엄연한 자연의 이치가 있지만
갈수록 인간사는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 정답을
모른 채 그냥그냥 살아가는가 봅니다.
다음은 십년 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TV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종이 호랑이로 전락하고 말았던 유년시절의
뼈아픈 추억을 담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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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TV를 대할 때마다 내게 가끔씩 떠오르는 게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골목대장이었던 시절이.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나는 그 당시의 사내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던
골목대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많은 아이들이 모인
공터에서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골목대장이 대뜸 나를
부르더니 어깨에 별 네 개짜리 계급장을 달아주는 게
아닌가. 훤칠한 키에 목소리가 남달리 우렁차서 골목
대장감으로 적격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감격은 하늘로 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그 계급장이 여느 구멍가게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값싼
모조품에 불과하였지만, 당시의 아이들은 골목대장의
허락 없이는 이등병 계급장일지라도 함부로 달 수 없었다.
즉, 골목대장이라는 위치는 우리 철부지들의 세계에 있어
선 하늘같이 떠받들어질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60년대 후반이었던 그 시절.
당시의 아이들은 지금처럼 공부라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일에 부모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머지 자식들의 공부를 일일이 챙겨볼 여가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떻게 해서든 집 밖으로 뛰쳐나가 신나게 놀고 싶어 안달
이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 보아야 마땅히 흥미를 붙여
볼 놀이기구도 없는 터라 귀는 줄곧 집 밖으로 열려 있었다.
즉, 누군가 자신을 부르길 바랬고 그것도 참을 수 없으면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서고 보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서로 불러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식후가(食後歌)’라는
노래가 있었다.
야, 야 애들 나와라
점심 (혹은 아침, 저녁) 먹고 심심한데
애들 나와라
누군가에 의해서 이 노래가 들려오면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마디로 말해서 ‘식후가’
라는 이 노래는 일종의 집합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모이는 족족 무리를 지어 이 노래를 목청껏 불러대며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단골 놀이터인 공터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웬만큼 모이면 골목대장이 앞에 나
서서 그 날의 놀이 계획과 순서를 발표하는 것이 상례였다.
놀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쟁놀이를 비롯하여 고지
뺏기, 도둑놈잡기, 기둥 말 타기, 달리기, ‘ㄹ’자 및 오징어
놀이, 비석 차기 등등. 특히 전쟁놀이나 고지 뺏기 같은 경우
는 이웃 동네 아이들과 편을 짜서 놀기도 하였다. 입 안에서
단내가 나도록 고함을 지르며 골목골목을 누벼도 피곤한 줄
몰랐다. 더구나 어른들도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얼굴을 찌푸
리거나 야단을 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게 우리들만의 세상
인 듯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으니 다름
아닌 TV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었다.
TV는 자유분방함을 만끽하던 우리들의 세계에 점차 먹구름
이 끼게 하였다. 게다가 그것은 나에게 쓰라린 추억마저 안겨
주었다. 초창기라 흑백이긴 해도 그 당시는 어지간히 잘살지
않으면 장만하기에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고가품이었다.
우리 집도 가나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던 터라 TV에 대해선
꿈도 꿀 수 없었다.
어쨌든 TV를 갖춘 집이 하나 둘 늘어갈수록 공터에 모이는
아이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식후가’를 아무리 악을
쓰며 불러대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애들도 있었다. 나는
길을 가다가 그들을 만나게 되면 왜 공터에 나오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어떤 아이는 나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예전엔 대장님, 대장님 하고 쫓아다니며 기죽어 있던
녀석이 말이다. 의리상 혹은 나의 강압에 눌려 마지못해 나온
아이들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잇는 듯 어떠한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시큰둥한 표정들을 짓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놈의 TV가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고 있는 한 골목대장이라는 내
감투는 종이 호랑이와 다를 바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자 우울
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쥐뿔도 재미없는 나날의 연속이었
다.
6학년 가을이 되자 나는 결심했다. 이름뿐인 골목대장의
감투를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인 겨울방학 때까지 기다릴 게
뭐 있느냐, 하루라도 빨리 벗어 던져 버리고 더 이상 그것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말이다. 그러한 의도로 나는 동생과 함
께 ‘식후가’를 여느 때보다 힘차게 부르며 예의 그 공터로
나갔다.
거기엔 네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좀더 기다려 보았으나 아이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나
는 불기가 사그라진 화로를 대하듯 옥죄어 드는 마음의 한기
에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나는 그 애들을 둘러보며 너희들 중 차기의 골목대장을
누가 맡겠느냐고 무겁게 입을 떼었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대답하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아무개 하고 부
르기만 해도 움찔 놀라거나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어떤 아이는 구구한 변명까지 늘어놓으며 다른
아이한테 떠넘기기에 급급하였다. 끝내는 그것이 불씨가
되어 저희끼리 언성을 높이며 싸움질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광경에 화가 치밀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그만두라고 소리를 지른 뒤 쓸쓸히 그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속엔 찬바람이 휙휙 불어댔다.
그 날 이후로 ‘식후가’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다
가 지나치며 보게 되는 공터는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1학년이던 봄에 우리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까지도 늘 그 모양이었다.
이따금 그 시절이 그리워지면 나는 그 동네를 찾아가 보
곤 한다. 그 동네는 이상하게도 숱한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
한 듯 뭐 하나 특별히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뱀같이 구불
구불한 골목이 그랬고, 집들도 퇴락한 상태일 뿐 예전 그대
로의 모습이었다. 단골 놀이터였던 공터도 타 용도로 쓰이
지 않은 채 있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쉽게 옛추억을 더
듬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불현듯 골목대장의 감투를 한껏 뽐내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식후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골목골목을 말처
럼 뛰어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일까 숨결이 가빠지고 자꾸
만 발이 헛디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단지 내 욕심일 뿐 그랬다가는 당장 이곳 주민들이 뛰쳐나
와 나를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며 고성방가 내지는
소란을 피운 죄로 인근의 파출소로 신고하지 않으면 천만
다행일 게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동네를 벗어날 때마다 마음속깊이
간직 돼 있는 별 네 개짜리 계급장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속엔 나를 닮은 사내 아이가 구김살없이
웃으며 제 곁으로 다가오라고 연신 손짓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따스한 손을 잡아보면 자주 만나지 못했던 피붙이
를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가움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그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지나온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얘기의 보따리를 풀기에 여념이 없다. 때때로 내
생활에 때가 끼고 마음마저 스산하여질 때 그는 내게 조용
히 속삭이기도 한다.
“섣불리 골목대장의 감투를 벗지 마세요. 뜻 같지 않은
세상일에 부대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이따금 저를
찾는 여유를 가져 보세요. 늘 다정한 친구가 되어 드릴
테니까요.”
하고 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못한 채 30년 동안 마음속
깊이 간직해 온 골목대장이라는 감투. 나는 그 사내애를
만나고부터는 그 감투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윤을 내는 별 네 개짜리 그
계급장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것을 남에게 물려주지 않
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계급장이 내게 있는 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것이며, 찬바람이 불어도 추위를
타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그 동네를 찾아가 서너 살짜리 코흘리개들만 몇
몇이 놀고 있는 공터를 바라보면서 별 네 개짜리 계급장을
슬며시 꺼내 본다.
(1997년)
댓글목록 0
오윤제님의 댓글
골목대장의 위세 대단하였더니만 지금은 대장 한마디에 열마디 합디다. 여태까지 계급장 갖고있으니 그 감투 무진장 좋은 것이구려. 아련한 개구쟁이 추억 떠올려 봅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골목대장님..당시 놀터가 지금 어디입니까..만석동인가요?
이성현70님의 댓글
인사동에서 어울리면 모두가 골목대장感이 옵니다
진우곤님의 댓글
놀이터는 화수동이었습니다. 한때 만석동과 화수동 깡패가 주름을 잡던 시절. 화수동 사거리에서 깡패의 일단이 무리를 지어 한바탕 싸움을 벌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후 그들은 깡패 소탕 작전으로 말미암아 사라졌지만....... 사회적 변혁기의 한 단면이지만.
윤용혁님의 댓글
화수동에서 육군대장이 탄생하셨군요.
골목대장 마빡이라는 개그 콘서트를 즐겨 봅니다.
진 선배님의 어릴 적 위세에 박수를 보냅니다.
마음을 골목대장으로 위로 삼아 매사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사시는 모습 좋습니다.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만석동 골목패거리들...인문니/명처리/...지난번 73회인가 거기서 진짜 별이 탄생햇다네요..화수동의 별님은 아마도 우곤님일듯...
장재학님의 댓글
학이 오징어 놀이 정말 잘 했었는데...ㅡㅡ,,,
김태희(101)님의 댓글
인문님은 송월동이라고 읽었는디 깡패님들 보수교욱 시키러 만석동으루 가셨나??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인문님은 송월동이라고 읽었는디 ===> 만석동이라 하면 만석꾼인줄 알고 태희님 도망칠듯하니..松月동이라고..in-moon(月) 이니..ㅋㅋ 꼬리칠수있는 일용할양식주시는 태희님...아프지마세요..아프면..ㅋㅋ
이동열님의 댓글
만석동 9번지에서 별(해군제독 임화순/73회)이 떳죠. 그옛날 화수동장이 울 외할아버지셨는데 인천극장 근처는 양아들 소굴,,,,그분들 다 지금 모하나?
이동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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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淳根님의 댓글
진짜루 만석동에 위치한 만석초등학교 출신은 1회는 70회 오태성선배외 다수, 2회는 71회 이순근외 다수,,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만x동출신들이..실세(?)네..부동산/교육/바다/ky계/hw계/yy계..요즘 보람이 안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