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잔설(殘雪)이 남아 있으니
본문
천방지축하던 시절을 지내고 인생의 첫맛을 음미할 때 만나 늘벗이 되어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 인생의 쓴맛도 알게 되는 이순도 낼모래면 맞이한다. 주책없이 늘벗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늘벗의 편린을 내어 보인다. 꾸중이 두렵다. 그래도 할수 없지
내보이고 싶은 것을
잔설(殘雪)이 남아 있으니
일전에 친구가 지리산에서 노루고기를 가지고 온다기에 친구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포식한 적이 있다. 일찌감치 지리산에 자리를 잡고자 마음 먹고 틈만 나면 찾아 가더
니 드디어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가운 일이다.
이제부터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무 때나 지리산으로 내려가 산나물을 안주삼아 머루,
다래, 더덕이나 오미자 등의 산술을 즐길 수 있기에 절로 신이 난다.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이 되어서 친구는 버스 한 대를 빌려 늘벗들을 초청하기에 시간을 내어 먼길
내려가서 하루를 즐겼다.
그곳은 멀리 천왕봉이 보이고 그 아래로 줄줄이 능선을 길게하여 자태를 뽐내는 곳으
로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지 땅에서 피어 오르는 것인지 서로 엉기고 설기어
장관을 이룬다. 어느 누가 살던 곳인지 정원도 잘 꾸며서 커다란 정원석은 있을 곳에
잘 다듬어 밖혀있고 나무도 웬간이 갖추어 있어 마당 끝 자락에는 산수유도 노랗게
피어있다.
정자를 소나무 기둥으로 세워 운치있게 만들어 놓으니 한옥의 그윽한 멋이 한층 더하
다.
친구는 건물 끝쪽을 가르키며 우리집의 명소라면서 쓰임새를 설명하는데 나는 말이
끝나자 마자 제일 먼저 들렀더니 그것은 다름 아닌 解憂所였다. 근심을 풀려고 이 세
상에서 가장편한 자세를 취하고 일상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고자 창문을 통해 바깥 세
상을 바라보는 순간 아까 보던 지리산 줄기들이 더욱 선명하다. 이제 연초록의 빛깔이
푸름을 더 하다가 붉어지면 언젠가는 하얗게 되겠지, 그럴 즈음 나는 눈처럼 소리없
이 방문해서 지리산의 백설을 만끽하리라 다짐한다.
삼사십 여년전부터 한달에 한번 모여 고스톱 치고 술 한잔 기울이고 헤어지는 모임이
지만 어느날인가는 우리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면 그 지방의 축제기간에 맞
추어 함께 모여서 구경도 하고 떠들다 보면 노년의 무료함이 조금은 반감되지 않겠냐
고 누군가 슬쩍 의견을 내비친 일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싹이 하나, 둘 두꺼운 땅껍질을
뚫고 파랗게 돋아나고 있다.
한 친구는 강원도 양구에 터를 마련하여 틈나는 대로 찿아가서 길을 다듬고 터를 고
르고 자갈을 골라내어 고추도 심고 콩도 심고 감자도 심었다고 자랑을 하더니 어느날
그를 만난김에 “농사 잘 되냐”고 물으니 말도 말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토관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라고 혼자 담아 놓았던 심사를 줄줄
이 털어 놓는다.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해 토관을 매설하는 일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맡
기 었는데 처음 말과는 달리 일의 진척은 전혀 없고 비용은 터무니없이 요구하는 바
람에 골치가 아프다는 소리이리라.
그 친구의 골치 아픈 일이 사라지면 아담하고 멋있는 통나무집이나 황토방이 골짜
기 어디엔가 기적같이 생기겠지 그리하면 머지않은 시절 계곡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
며 차거운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으로 흐르는 행복을 滿喫하면서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하는 날이 조만간 찾아오겠지 이렇게 한두 사람의 친구들이 일을 진행하여
서너곳에 이를라 치면 정말 좋겠다.
다산 정약용이 竹欄詩社怗에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
면 한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에 연꽃이
구경할만 하면 한번 모이고, ....” 하는 열다섯 보다는 덜하지만 우리도 열이 또는 열
여덟이 철쭉이 활짝 피었으니 함께 모이고, 다래가 익었으니 함께 모이고, 송이가 나
왔으니 함께 모이고, 殘雪이 남았으니 함께 모여 세월을 노래할 것을 상상해 보라!
늙어도 즐겁지 아니한가!
몇달 전인가 또 한 친구가 양수리 지나 수능리라나 산을 한참 올라 내려오는 기슭에
집을 장만 하였다고 하여 마음 먹고 들러 보았더니 넓직한 정원에 우뚝 선 이층 통나
무집이 내 마음을 압도한다. 이건 조그만 별장이 아니라 으르으리한 대궐이라서 심
사가 꼬인다. 잠시 흐르던 시샘은 구경을 하는 동안 안개처럼 사라지고 또 한곳의 운
치 좋은 별장이 생겼다는 것에 흡족해 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또 한 친구는
강화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더냐? 강화 시골집에서 하루쯤 묶으며 마니산 능선을
따라 확 트인 강화 앞 바다를 내려다 보며 마음을 씯고, 함허동천 계곡에서 헤메이다
보면 세상 근심 잠시 잊고, 보문사 층계 올라 석불을 보며 무탈을 바라며 다니는 즐거
움도 마련해 놓은 것은 아닌가.
그럼 나는 어디로 정할까?
인천이 고향인 나는 딱히 정할 곳이 없다. 동서가 대부도라니 사정사정하여 선산 산
자락 조금 빌려서 토담집을 지을까, 아니면 처남의 처갓집이 영월의 南江과 東江이 한
데 모이는 경치 좋은 곳이라던데 내게 행운이 있다면 산자락 한 뼘 정도 염치 없이
달래어서 오두막을 지을까 황토방을 지을까 아니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 지어 천년
만년 살까 하면서 부질없는 지었다 부수었다를 반복 하고 있다.
댓글목록 0
윤용혁님의 댓글
정극인의 상춘곡을 보듯 풍류에 시를 띄우는 두보시인처럼
유유자적 마음을 펼치시는 진 선배님의 여유를 봅니다.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실 선배님의 모습을 따라가고 싶답니다.
이상동님의 댓글
선배님 허락도없이 글간격을 수정했씀돠...죄송합니다.
崔秉秀(69回)님의 댓글
하루에도 몇 채를 짓다가 허물곤 하는 게, 우리 때 하는 일이기도 하지..좋은 데는 다 짓고, 금강산만 남았군...금강산에 별장을 짓게나...[나도 꿈에서 한 채 지었다구]... 여기에 있는 친구들 별장이 모두가 자네 껏이기도 하단다.. 같이 살면서 놀러 가면, 자네꺼지 뭐 다른 게 있남요..ㅋㅋㅋ...
오윤제님의 댓글
상동아우님 감사하오. 천방지축부터 내보이고 싶은것을까지는 머릿글이고 잔설이 남았으니
가 제목인데 그것까지 수정했네요. 제목만 다시 수정 바랍니다
이동열님의 댓글
인제에 살으리랏따~~!!!!!!!!!!!
윤인문님의 댓글
선배님 글을 보니 법정스님이 주장하는 무소유란 말이 생각나네요..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오윤제님의 댓글
양구나 양평은 몰라도 지리산 智樂堂(?)은 그 친구 인사동에서 왔다 하면 반색할 것입니다.
이동열님의 댓글
<IMG src="http://avatarimage.hanmail.net/CharImg/Hero/27/HWP_341_050201.gif"border=0>☜여기에 꼬리 좀 달아줘유~~♬♪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지리산이야긴듯한데..노랜 금강산..저도 이제 산이야기를 올려야할듯..저는 읽은책도 들은기억도 없지만 제가 보고/느낀 산이야기를 적을겁니다..정약용/정극인/법정..잘몰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