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강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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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코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가 다 인정하는 바이며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성군 세종대왕이 우리에게
더욱 빛나고 추앙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한민족 말살정책으로
창씨개명과 학교에서 일본어 외에 우리말을
못 사용하게 하는 바람에 일제 때 소학교를 다니신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한글을 겨우 익히셨다.
어릴 적 나의 산골마을에는 보따리장수 아주머니들이
옷이나 사발, 생선 등을 팔러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산동네를 많이 찾아들었다.
고된 삶의 피로를 파르르 떨며 내려놓고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물건을 하나 둘씩 팔았다.
몸집이 아주 작은 사발장사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물건을 흥정하는 도중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 졸다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 졸린 눈을 비볐다.
먼 길에 그 무거운 사발을 광주리에 담아 발발 떨며
찾아 왔으니 지쳐 눈을 잘 못 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인정이 많으신 어머니는 찬 숭늉 한 대접을 떠다드리며
“정신 차리시겨 아주머이! “하며 웃으셨다.
당장 필요치도 않으시면서 사발그릇 몇 개를 사주시고
콩이나 팥으로 값을 매겨 대금으로 주시니 그 아주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다시 일어서려면 아까보다 더 힘들어 하셨다.
간신이 바들바들 떨며 일어나 문밖을 나가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그런데 옷 장사 아주머니와는 유독 외상거래를 하셨는데
두 분 끼리 양쪽 장부를 작성하고 계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연화아주머니 외상값이
얼마나 되는지 외상장부를 가져와 읽어 보라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외사가 어나 아즈머 바지까 사 처너 나머쓰”
나는 “어머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였더니 “넌 국민 학생씩이나 되면서 글도 못 읽니?” 하시면서
“외상값, 연화아줌마 바지 값 사천 원 남았음 아니니?”
나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나뒹구니 “너도 이놈아, 학교에서
글을 안 배워봐! 나랑 똑같지.“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옆집 아주머니보다 훨씬 나으셨다.
그 아주머니는 아무튼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라”
군에 간 아들의 편지도 읽을 줄 몰라 늘 우리 집에 가져와
읽어 달랬고 답장도 부탁하였다.
그래도 나의 어머니는 쓰기만 엉성했지 저녁이면 기도 후
성경을 잘도 읽어주셨고 성가도 불러주는 정다운 어머니셨다.
중동에 건설 붐이 한창일 때 나간 지 얼마 안 된 한 노무자가
아내로부터 받은 편지한통에 기가 막혀 만사제치고 돌아와 아내의
뺨을 올려붙였다는 이야기를 예비군 훈련 시 한 대원으로부터
휴식시간에 듣고 웃다 뒤로 나자빠졌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온 남편으로부터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부인은
“보소! 와 그리는겨.”하며 황당해 했다는 이야기다.
내용인즉, 열사의 땅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그 부인은 알뜰히 살림을
꾸려 나가기위해 봉지를 밤낮으로 열심히 붙여 팔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에 쓰기를 “여보 나는 봉지를 팔아 잘 살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세요.“ 라고 쓴다는 것이 그만 봉자에 o받침을 빼는 바람에 엄청난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어린 나를 강화 하점면외가에
맡겼는데 어미젖을 못 먹는 아이에게 쌀 미움을 끓여주었더니
설사로 다 죽어가 올챙이가 된 아이를 엎고 매일 수 십리 길의
읍네 병원까지 걸어가 살려 놓았다는 나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외사촌 누님이 계셨다.
이 누님이 방학 중 서울에서 내려와 있는 성균관 대학 국문과에 다니는
사촌 남동생이 강화읍에 간다기에 급히 쪽지에 적어 물건을 사다달라고
부탁하였다.
자기볼일을 다 마친 사촌 남동생은 갑자기 사촌누님이 아침에 부탁한 것이
생각나 쪽지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강코”라고 적혀있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이리 묻고 저리 물어도 아는 사람은 없고 그 바람에
막차만 놓쳐 수 십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 누님에게 여쭈니
길섶을 긁는 “갈퀴”도 모른다고 면박을 주면서 국문과 다닌다는 것이
맞는지를 되묻자 나의 외사촌 형은 할 말을 잃고 어디다 하소연도
못했다. “강코”가 또 한 번 사람을 울렸던 것이다.
요즘 명문 S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맞춤법은 물론 자기이름도 한자로
겨우 그려 쓰고 더더욱 부모님의 존함을 한자로 못 옮긴다는 소리에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비록 맞춤법이 틀렸어도 어머니가 쓰신 글자가 이제와
더욱 더 그리워지고 지금에 내가 있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로 제단을 쌓으신 소중한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날 살려낸 외사촌 누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날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울러 우리말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이 되고자한다.
댓글목록 0
李桓成님의 댓글
70년대 울엄니도 강화가셔 스댕주발을 머리에 이고 문고개/피미/도장리/관청리/당산리..다니셨던 아픈 기억이...어어엉..난 봉지도 접을수 없었네..
윤용혁님의 댓글
환성형님, 눈물 납니다. 그 무거운 스텐레스 주발 머리에 이시고 ...
남자는 봉지 안 접는 거래요.
李桓成님의 댓글
우리가 스탱공장 출신아닌가..그러다 사업실패해 스뎅을 머리 이고 다니신 엄니..스뎅값을 돈으로 받은게 아니고 쌀로 받아 오셨으니...바위고개 눈물납니다...지금 복바쳐 울고있네요..울엄니 올90..나는 역할을 못합니다..딸7에 아들1...
李桓成님의 댓글
용혁이는 마술사..진짜 情없는 나를 울리네...
장재학님의 댓글
“외사가 어나 아즈머 바지까 사 처너 나머쓰”^^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스댕주발..눈물겹군요..그래서 成님은 공과대학 금속과를 가셨나?
윤용혁님의 댓글
스뎅주발 몇개보다 쌀이나 콩밭의 무게가 더 나아가 그 아주머니의
목이 더욱 자라목이 되어 길을 나설 때면 어린마음에도 아주 안스러웠답니다.
환성형님, 도장리는 제 고향 양도면에 있고요,관청리는 저의 처가집 동네,
당산리,피미, 아! 그리운 지명이랍니다.
형! 울지마세요. 저도 마음이 울컥 ............
윤용혁님의 댓글
학이 후배, 맞춤법이 틀려도 정겨운 어머니의 글시체가 더욱 그리워 진다오.
인문형님, 스댕그릇의 반짝임에 얼굴을 비추면 넓게 퍼져 추남이 되었지요.
환성형님의 마음도 달래 주세요. 그 형님, 어머니 생각에 저도 눈물납니다.
아주 어렵던 시절,그리고 추운날, 어머니들은 가족생계를 위해 그리도 고생하셨죠.
오윤제님의 댓글
그래도 그 시절은 못 배우긴해도 이름은 있었지요.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이름도 없이 살다얻은 이름 우리 할머니는 애기라나요. 백모님은 할아버지 비슷 지은 성봉이구요. 배우지 못한 한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 불붓고 있네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용혁님 미국의소리님 연결좀 해봐..인사동에 봄이왔다고 전해드리게..회사선 국제통화불가능..영어도 딸리고..
이환성(70회)님의 댓글
배종길(67회): [03/06 10:09]
재준아 ! 후배들만 챙기지 말고 67 동기도 좀 챙겨라 67 동기(특히 9.4회)중에 새해들어 금연 ,금주 한 친구가 있는걸로 아는데....혹시 마지막남긴 출석부꼬리 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