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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義城) 문학기행 후기
작성자 : 진우곤
작성일 : 2007.08.10 22:32
조회수 :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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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義城) 문학기행 후기
진 우 곤
그 어느 때보다 일찍 기상했다. 다름 아닌 제15차 자유문학회 정기총회와 제77회 한국 시낭송 회의를 겸한 제8차 경북 의성(義城)으로의 문학기행이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인근으로의 가벼운 산보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든 뒤 떠날 차비를 차렸다.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었다. 사실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행사가 아니면 서로 얼굴을 대할 기회가 드물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문학기행만큼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나에게 아내는 즐겁게 구경하고 오라며 손을 흔들더니, 혹시 시간이 나거들랑 마늘을 좀 사오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뒤통수가 근질거릴 만큼 사뭇 멋쩍었다. 까닭인즉 의성이 마늘의 고장임을 그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소위 문학기행을 간다면서 그 고장의 특산물이나 역사, 풍습, 문화 등등 그 어디에도 백지 상태인 채로 떠나는 내가 짜장 우습기도 하여 더욱 그랬다.
아무튼 아내를 통하여 얻은, 의성이 마늘의 고장이라는 한 가지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집을 나섰다. 양재역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결지인 서초구민회관 옆에 있는 전용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8시였다. 몇몇 낯익은 이들이 보이기에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최종적으로 인원 점검을 마친 8시 45분쯤에야 상임 고문이신 신세훈 선생님과 김종제 회장님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탄 가운데 관광버스는 의성을 향해 출발했다. 이내 나는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에 가슴이 확 트였다. 바쁘게 사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여간 큰 기쁨이 아니었다. 하여 눈 한 번 붙이지 않은 채 창밖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의성 빙계3리 서원마을에 있는 ‘빙계(氷溪) 계곡’에 도착했다. 3시간 반 정도가 걸린 셈이다. ‘시집 못 간 암탉’이라는 음식점 앞에 모두들 내렸다. 거기서 닭 요리를 들며 제15차 자유문학 정기총회, 제77회 한국 시낭송회 행사를 가졌다. 특히, 김종우 의성문화원장님을 비롯하여 안동 및 상주, 그리고 의성 문인협회 회원들도 손수 찾아와 주어 자리가 더욱 빛났다.
정기총회 후에는 입담이 좋은 김진중 민조시인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시낭송회를 가졌다. 자기 소개 및 자작시 해설로 멋들어진 시 낭송은 때때로 웃음바다를 이루거나 아침이슬 같은 영혼들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자아내어 여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공식적인 회의가 끝났다. 음식점을 나서니 햇살이 여간 따갑지 않았다. 그 후 본격적으로 유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다. 몇 발짝을 걸어가니 시냇물 속에 우뚝 솟은 한 개의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진, ‘경북필승지일(慶北必勝之一)’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이 계곡이 경북 8승의 하나라는 얘기다. 빙산이라는 이름도 얼음구멍과 바람구멍이 있어 붙여졌으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내를 빙계라고 부른단다. 빙계 8경으로는 앞서 소개한 빙혈(氷穴), 풍혈(風穴)을 비롯하여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석탑(石塔), 불정(佛頂), 용추(龍湫)가 있다.
우선 부근에 있다는 보물 제327호로 지정된, 8.15미터 높이의 대형 탑으로서 고려 초의 석탑이라는 ‘빙산사지오층석탑’을 보았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탑이다. 그곳을 지나자 찬 기운이 느껴졌다. 한여름에는 서늘하여 무더위를 식혀주고, 추운 겨울에는 따스한 기운이 돈다는 빙혈((氷穴), 풍혈(風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더워서 일까 너도 나도 빙혈과 풍혈에 들어갔다 나오며 신기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식히기엔 그만이었다. 회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서 도로 나와 내를 따라 만들어진 등산로를 더 걸어 내려가니 ‘빙계서원’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가 간간이 뿌렸다. 하여 서원 안의 모습을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채 서둘러 화보용 단체사진을 찍은 뒤 버스에 올랐다.
2차 행선지로 ‘조문국 경덕왕릉’ 쪽으로 향했다.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 경덕왕릉’ 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분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능의 둘레가 74미터, 높이가 8미터가 된다. 신라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하며 주변에는 40여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산운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의성의 영산(靈山)인 금성산 아래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는 산운마을의 폐교를 활용하여 자라나는 세대의 자연학습 및 환경에 대한 가치관 형성 공간을 마련하였다는 ‘산운 생태공원’은 나름대로 아기자기함을 자아내었다.
일정이 촉박하여 주변 공간을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한 채 홍보관으로 들어가 의성군 유래와 특산물, 관광코스 및 지역행사 자료를 관람했다. 전시실 1에는 지진과 화산활동, 생명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실 2에는 인류의 진화과정,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 전시실 3에는 공룡 화석과 공룡의 연대기, 그리고 공룡의 생존 모습 재현, 마을 자료관에는 산운마을의 유래와 보물이나 천연기념물도 지정된 지방문화재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다시 서둘러 출발하여 국보 제77호로서 화강암으로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탑리오층석탑’을 구경했다. 부분적으로 전탑의 수법과 목조건물의 양식도 보여준다. ‘빙계 계곡’에서 보았던 ‘빙산사지오층석탑’ 에 비해 1.4미터 정도가 높으며, 기단 폭은 4.51미터로 경주 분황사의 석탑과 비슷하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탑 중 대형 석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단다.
그 후 천연기념물 405호인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크다는 ‘점곡사촌가로숲’으로 갔다. 약 600년 전 안동 김씨의 입향(入鄕) 시조인 김자첨(金子瞻)이 안동에서 사촌으로 옮겨 ‘사촌마을’이 형성될 때 서편의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도 휴식을 할 수 있게 나무를 심었던 것인데 즉,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방풍림이 자라서 거대한 풍치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장대한 숲이었다.
숲 속의 수종은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10여 종이나 되며, 수령(樹齡)이 수백 년이나 되는 거대한 나무도 있다니 놀라웠다.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겨울에는 설경이 또한 빼어나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김진중 시인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황새 똥’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 숲에서 자주 놀았었는데 황새가 갈긴 똥이 재수없게 머리에 떨어지면 얼마나 독한지 머리털이 다 빠질 정도였단다. 이 말을 듣고 모두들 의아해하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 조금 걸어서 사촌마을로 갔다. 그 마을은 안동 김씨와 풍산 유씨의 집성촌으로서 기라성 같은 송은 김광수,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 류성룡, 천사 김종덕 등 많은 유현(儒賢)이 태어났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한다.
30여 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遺存)하고 특히 ‘만취당(晩翠堂)’은 안동 김씨의 종실(宗室)로 사용되어 온 11칸의 대청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란다. ‘만취당(晩翠堂)’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며 ‘만취당’은 조선 선조 때 사람인 ‘김사원(金士元)’의 호였다고 한다. 김진중 시인은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는 탓에 친구들 20여 명이 대청 바닥에 누워 자기도 한다고 들려주었다.
그 후 사촌마을을 벗어나 본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저녁 공양이 예약되어 있다는 ‘고운사(孤雲寺)’를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경내에 들어서서 김진중 시인으로부터 사찰에 대한 연혁을 들었다. 예전에는 상당한 위엄을 지니고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지금은 의성이 낙후됨에 따라 덩달아 산사도 유명세가 사뭇 떨어져 과거의 화려 찬란함을 되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단다.
‘고운사(孤雲寺)’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 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이름이 ‘고운사(高雲寺)’였는데, 신라 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여사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지금의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단다.
저녁 공양은 비빔밥이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고추장으로 비볐다. 먹어 보니 별미였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지 맛있게들 들고 있었다. 하긴 쫓기듯 일정에 맞추느라 차에 오르고 내리기를 얼마나 하였던가. 게다가 제법 걷기도 하였으니 더 그랬을 게다.
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예불이 있을 모양인지 젊은 스님들이 큰북과 대종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두 스님이 번갈아 가며 큰북을 쳤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북소리 가락에 심취하오라니 점차 내 몸에 붙어있는 속진(俗塵)들이 생선 비늘처럼 떨어지는 듯이 느껴졌다. 이어진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대종을 치는 소리엔 더더욱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욕구마저 들불처럼 일렁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비도 오고 교통이 막힐지 모르니 속히 떠나자고 입을 모으는 바람에 차에 몸을 실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가 어우러진 산자수명한 경관과 은은히 배어있는 역사의 향기에 흠뻑 젖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를 만큼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족되었던 시간들을 뒤로 한 채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음이 서운하기 짝없었다.
시간이 모자라 고려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영남의 4대루에 속한다는, 구봉공원 내에 있다는 ‘문소루’와 공룡발자국 화석, 그리고 토출 온도 25.7도로 게르마늄, 화산염, 유황, 탄산 등 복합약수온천으로100% 온천수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탑산약수온천’,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오성(五聖)과 22현(賢)을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의성 향교’와 ‘비안 향교’ 등등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기 그지없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서로 소감을 털어놓는 자리에서 나와 같이 의성이 초행길이라는 회원들이 제법 많았고, 뜻 깊은 문학기행이지만 하루 코스로 모든 걸 둘러보기엔 무리가 있다며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더 오자는 쪽으로 입이 모아졌다.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 하나를 심어 하나의 수확이 있는 것은 곡식이고, 하나를 심어 열 배의 수확이 있는 것은 나무이다. 또 하나를 심어 백 배의 수확이 있는 것은 인재(人材)이다. --
이 구절은 중국 제나라 재상이었던 관중(管仲:?∼BC645)이 지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이다. 굴곡이 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 대대로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는 의와 예의 고장인 의성(義城). 그러함에도 여타의 시나 군에 견주어 오랫동안 발전적인 요소가 없어 상당히 낙후되었다고 그곳 출신의 문인들은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 반이었다. 선물로 받은 마늘을 내놓으니 아내는 반색을 했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말하며 재미있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늘은 그저 감탄의 연발이었던 소중했던 하루였다. 새롭게 접하게 된 경북 의성(義城)으로의 문학기행. 그것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 주었고, 넉넉함을 품고 돌아온 것이라 흐뭇하기 짝없었다. 귀에 들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발길이 닿는 곳마다 쩍쩍 달라붙던 풍성한 역사의 향기. 다만, 다만 낙후된 고향을 보고 쓸쓸한 표정을 짓던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내 마음마저 흡사 불기 잃은 화로를 껴안은 것 같음을 어쩌지 못했다.
(2007년 6월)
진 우 곤
그 어느 때보다 일찍 기상했다. 다름 아닌 제15차 자유문학회 정기총회와 제77회 한국 시낭송 회의를 겸한 제8차 경북 의성(義城)으로의 문학기행이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인근으로의 가벼운 산보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든 뒤 떠날 차비를 차렸다.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가슴이 설레었다. 사실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행사가 아니면 서로 얼굴을 대할 기회가 드물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문학기행만큼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나에게 아내는 즐겁게 구경하고 오라며 손을 흔들더니, 혹시 시간이 나거들랑 마늘을 좀 사오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뒤통수가 근질거릴 만큼 사뭇 멋쩍었다. 까닭인즉 의성이 마늘의 고장임을 그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소위 문학기행을 간다면서 그 고장의 특산물이나 역사, 풍습, 문화 등등 그 어디에도 백지 상태인 채로 떠나는 내가 짜장 우습기도 하여 더욱 그랬다.
아무튼 아내를 통하여 얻은, 의성이 마늘의 고장이라는 한 가지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집을 나섰다. 양재역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결지인 서초구민회관 옆에 있는 전용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8시였다. 몇몇 낯익은 이들이 보이기에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최종적으로 인원 점검을 마친 8시 45분쯤에야 상임 고문이신 신세훈 선생님과 김종제 회장님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탄 가운데 관광버스는 의성을 향해 출발했다. 이내 나는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에 가슴이 확 트였다. 바쁘게 사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여간 큰 기쁨이 아니었다. 하여 눈 한 번 붙이지 않은 채 창밖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의성 빙계3리 서원마을에 있는 ‘빙계(氷溪) 계곡’에 도착했다. 3시간 반 정도가 걸린 셈이다. ‘시집 못 간 암탉’이라는 음식점 앞에 모두들 내렸다. 거기서 닭 요리를 들며 제15차 자유문학 정기총회, 제77회 한국 시낭송회 행사를 가졌다. 특히, 김종우 의성문화원장님을 비롯하여 안동 및 상주, 그리고 의성 문인협회 회원들도 손수 찾아와 주어 자리가 더욱 빛났다.
정기총회 후에는 입담이 좋은 김진중 민조시인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시낭송회를 가졌다. 자기 소개 및 자작시 해설로 멋들어진 시 낭송은 때때로 웃음바다를 이루거나 아침이슬 같은 영혼들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자아내어 여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공식적인 회의가 끝났다. 음식점을 나서니 햇살이 여간 따갑지 않았다. 그 후 본격적으로 유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다. 몇 발짝을 걸어가니 시냇물 속에 우뚝 솟은 한 개의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진, ‘경북필승지일(慶北必勝之一)’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이 계곡이 경북 8승의 하나라는 얘기다. 빙산이라는 이름도 얼음구멍과 바람구멍이 있어 붙여졌으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내를 빙계라고 부른단다. 빙계 8경으로는 앞서 소개한 빙혈(氷穴), 풍혈(風穴)을 비롯하여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석탑(石塔), 불정(佛頂), 용추(龍湫)가 있다.
우선 부근에 있다는 보물 제327호로 지정된, 8.15미터 높이의 대형 탑으로서 고려 초의 석탑이라는 ‘빙산사지오층석탑’을 보았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탑이다. 그곳을 지나자 찬 기운이 느껴졌다. 한여름에는 서늘하여 무더위를 식혀주고, 추운 겨울에는 따스한 기운이 돈다는 빙혈((氷穴), 풍혈(風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더워서 일까 너도 나도 빙혈과 풍혈에 들어갔다 나오며 신기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식히기엔 그만이었다. 회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서 도로 나와 내를 따라 만들어진 등산로를 더 걸어 내려가니 ‘빙계서원’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가 간간이 뿌렸다. 하여 서원 안의 모습을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채 서둘러 화보용 단체사진을 찍은 뒤 버스에 올랐다.
2차 행선지로 ‘조문국 경덕왕릉’ 쪽으로 향했다.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 경덕왕릉’ 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분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능의 둘레가 74미터, 높이가 8미터가 된다. 신라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하며 주변에는 40여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산운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의성의 영산(靈山)인 금성산 아래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는 산운마을의 폐교를 활용하여 자라나는 세대의 자연학습 및 환경에 대한 가치관 형성 공간을 마련하였다는 ‘산운 생태공원’은 나름대로 아기자기함을 자아내었다.
일정이 촉박하여 주변 공간을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한 채 홍보관으로 들어가 의성군 유래와 특산물, 관광코스 및 지역행사 자료를 관람했다. 전시실 1에는 지진과 화산활동, 생명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실 2에는 인류의 진화과정,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 전시실 3에는 공룡 화석과 공룡의 연대기, 그리고 공룡의 생존 모습 재현, 마을 자료관에는 산운마을의 유래와 보물이나 천연기념물도 지정된 지방문화재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다시 서둘러 출발하여 국보 제77호로서 화강암으로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탑리오층석탑’을 구경했다. 부분적으로 전탑의 수법과 목조건물의 양식도 보여준다. ‘빙계 계곡’에서 보았던 ‘빙산사지오층석탑’ 에 비해 1.4미터 정도가 높으며, 기단 폭은 4.51미터로 경주 분황사의 석탑과 비슷하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탑 중 대형 석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단다.
그 후 천연기념물 405호인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크다는 ‘점곡사촌가로숲’으로 갔다. 약 600년 전 안동 김씨의 입향(入鄕) 시조인 김자첨(金子瞻)이 안동에서 사촌으로 옮겨 ‘사촌마을’이 형성될 때 서편의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도 휴식을 할 수 있게 나무를 심었던 것인데 즉,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방풍림이 자라서 거대한 풍치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장대한 숲이었다.
숲 속의 수종은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10여 종이나 되며, 수령(樹齡)이 수백 년이나 되는 거대한 나무도 있다니 놀라웠다.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겨울에는 설경이 또한 빼어나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김진중 시인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황새 똥’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 숲에서 자주 놀았었는데 황새가 갈긴 똥이 재수없게 머리에 떨어지면 얼마나 독한지 머리털이 다 빠질 정도였단다. 이 말을 듣고 모두들 의아해하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 조금 걸어서 사촌마을로 갔다. 그 마을은 안동 김씨와 풍산 유씨의 집성촌으로서 기라성 같은 송은 김광수,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 류성룡, 천사 김종덕 등 많은 유현(儒賢)이 태어났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한다.
30여 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遺存)하고 특히 ‘만취당(晩翠堂)’은 안동 김씨의 종실(宗室)로 사용되어 온 11칸의 대청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란다. ‘만취당(晩翠堂)’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며 ‘만취당’은 조선 선조 때 사람인 ‘김사원(金士元)’의 호였다고 한다. 김진중 시인은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는 탓에 친구들 20여 명이 대청 바닥에 누워 자기도 한다고 들려주었다.
그 후 사촌마을을 벗어나 본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저녁 공양이 예약되어 있다는 ‘고운사(孤雲寺)’를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경내에 들어서서 김진중 시인으로부터 사찰에 대한 연혁을 들었다. 예전에는 상당한 위엄을 지니고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지금은 의성이 낙후됨에 따라 덩달아 산사도 유명세가 사뭇 떨어져 과거의 화려 찬란함을 되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단다.
‘고운사(孤雲寺)’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 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이름이 ‘고운사(高雲寺)’였는데, 신라 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여사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지금의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단다.
저녁 공양은 비빔밥이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고추장으로 비볐다. 먹어 보니 별미였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지 맛있게들 들고 있었다. 하긴 쫓기듯 일정에 맞추느라 차에 오르고 내리기를 얼마나 하였던가. 게다가 제법 걷기도 하였으니 더 그랬을 게다.
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예불이 있을 모양인지 젊은 스님들이 큰북과 대종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두 스님이 번갈아 가며 큰북을 쳤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북소리 가락에 심취하오라니 점차 내 몸에 붙어있는 속진(俗塵)들이 생선 비늘처럼 떨어지는 듯이 느껴졌다. 이어진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대종을 치는 소리엔 더더욱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욕구마저 들불처럼 일렁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비도 오고 교통이 막힐지 모르니 속히 떠나자고 입을 모으는 바람에 차에 몸을 실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가 어우러진 산자수명한 경관과 은은히 배어있는 역사의 향기에 흠뻑 젖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를 만큼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족되었던 시간들을 뒤로 한 채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음이 서운하기 짝없었다.
시간이 모자라 고려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영남의 4대루에 속한다는, 구봉공원 내에 있다는 ‘문소루’와 공룡발자국 화석, 그리고 토출 온도 25.7도로 게르마늄, 화산염, 유황, 탄산 등 복합약수온천으로100% 온천수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탑산약수온천’,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오성(五聖)과 22현(賢)을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의성 향교’와 ‘비안 향교’ 등등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기 그지없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서로 소감을 털어놓는 자리에서 나와 같이 의성이 초행길이라는 회원들이 제법 많았고, 뜻 깊은 문학기행이지만 하루 코스로 모든 걸 둘러보기엔 무리가 있다며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더 오자는 쪽으로 입이 모아졌다.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 하나를 심어 하나의 수확이 있는 것은 곡식이고, 하나를 심어 열 배의 수확이 있는 것은 나무이다. 또 하나를 심어 백 배의 수확이 있는 것은 인재(人材)이다. --
이 구절은 중국 제나라 재상이었던 관중(管仲:?∼BC645)이 지은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이다. 굴곡이 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 대대로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는 의와 예의 고장인 의성(義城). 그러함에도 여타의 시나 군에 견주어 오랫동안 발전적인 요소가 없어 상당히 낙후되었다고 그곳 출신의 문인들은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 반이었다. 선물로 받은 마늘을 내놓으니 아내는 반색을 했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말하며 재미있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늘은 그저 감탄의 연발이었던 소중했던 하루였다. 새롭게 접하게 된 경북 의성(義城)으로의 문학기행. 그것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 주었고, 넉넉함을 품고 돌아온 것이라 흐뭇하기 짝없었다. 귀에 들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발길이 닿는 곳마다 쩍쩍 달라붙던 풍성한 역사의 향기. 다만, 다만 낙후된 고향을 보고 쓸쓸한 표정을 짓던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내 마음마저 흡사 불기 잃은 화로를 껴안은 것 같음을 어쩌지 못했다.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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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문(74회)님의 댓글
경북 의성이 그렇게 좋은 곳인지 미처 몰랐네..아주 뜻깊은 문학기행이었구먼..항상 건필하여 주니 고맙기 그지없네..친구..
오윤제님의 댓글
정자와 정원이 함양이나 산청에 많이 있음을 듣고 보았는데 의성에도 만취당의 고옥이 있으니 유려한 정원 또한 있겠습니다. 학문에 정진하다 시 한수 남기는 옛 선비들 맥을 잇지 못하고 지금의 어지러운 말들. 의성의 마늘로 입을 세척하라고 하고십네요
윤용혁님의 댓글
정말 멋신 문학기행이셨군요.경북 의성,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박남호(87)님의 댓글
이글을 접하다보니 문득 고교시절 갑사로 가는길이 떠오르른건 그저 기행이란말에 뜻없이 머리속을 내려옵니다. 문학기행이라하지만 방학때 친척네 놀러갔다 바리바리 싸주시던 콩이며,찹쌀이며,생강등을 싸주시던 아이들과 같았다는 느낌을 마지막 구절에 연상이 되는군요 기행이한말 오랜말에 혼자 중얼거려봅니다.
박남호(87)님의 댓글
이글을 접하다보니 문득 고교시절 갑사로 가는길이 떠오르른건 그저 기행이란말에 뜻없이 머리속을 내려옵니다. 문학기행이라하지만 방학때 친척네 놀러갔다 바리바리 콩이며,찹쌀이며,생강등을 싸주시던 아이들과 같았다는 느낌을 마지막 구절에 연상이 되는군요 기행이한말 오랜말에 혼자 중얼거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