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징검다리
본문
두 달 간의 지방 출장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신변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기울일 여가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징검다리 역할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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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우 곤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 바람을 쐬러 가는 곳이 하나가 있다. 다름아닌 내가 사는 인덕원 삼호아파트 단지 후문 도로 앞에 있는 지방 2급 하천인 ‘학의천’ 냇가인데 폭은 넉넉잡아 10미터 남짓 된다. 도시민의 휴식처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고,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얘기를 나누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이들도 더러 보인다.
그곳에는 안양 평촌동 ‘대우아파트’ 쪽과 ‘인덕원 삼호아파트’ 쪽을 왕래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여름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너 다닐 수 없을 때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왜냐하면 냇물이 흐르는 곳을 가로질러 두 개의 육교가 서있긴 하나 위아래로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만일 중간에 그 징검다리가 없다면 상당히 우회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행자의 편리를 위해 징검다리는 요긴한 쓰임새를 갖추고 있다 아니할 수 없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징검돌들은 이리저리 얼마나 닳고 닳았을까.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을 게다. 숱하게 밟고 지나갔을 발자국들, 그리고 비와 눈은 또 얼마나 내리고 덮였을까. 계절마다 부는 바람도 그 곳을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묵묵히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징검다리. 다행인 것은 징검돌들이 외관상으로 보건대 크고 단단하여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 징검돌을 디디고 다닐 때마다 정겨움을 느낀다. 하여 이따금 그 징검다리를 건너야 할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서도 구태여 발걸음을 그리로 향하는 때가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은 채 몇 발짝 떨어져서 그냥 바라만 보더라도 즐겁기도 하고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지나간 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며 또 다른 삶의 모습이 가슴속에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즉, 세월의 여러 구비를 돌며 접했던 숱한 사람과 환경, 혹은 어떤 특정한 사건들. 그 중에는 고맙게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나를 낳아서 길러주고 앞길을 터준 부모의 은혜요, 나와 인연을 맺은 형제간의 의리다. 저마다 제 갈 길로 가고 있지만 바쁘게 사느라 자주 만나지 못한다. 맏아들로서, 형으로서, 오빠로서 제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리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내게 힘을 보태주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 언제 한데 얼려 서로 못다 나눈 얘기들을 마음껏 풀어헤쳐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먹고 사는 일이 족쇄처럼 여겨질 때마다 더더욱 그리운 정이 깊어만 간다.
그리고 올 2월 25일에 73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지만 칼럼니스트 이규태 선생은 내가 사숙(私淑)하던 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에 목마르고 배움에 허기져 있던 나의 습작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한번도 그 분을 직접 뵙지 못했지만 그 분이 쓴 다수의 책들을 애독하면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신명 나게 풀어내는 다양하고 풍부한 해박한 지식에 놀라웠고, 예리한 통찰력이 곁들인 논리 정연한 문장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항상 내게 걸림돌로 작용하는 문장력 강화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간접적이나마 그 분의 숨결과 체취로 말미암아 나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을 보다 폭넓게 바라보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작가로서 활동하는 지금도 나는 틈틈이 그 분의 책을 접하곤 한다. 특히, 하수상한 시국에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듯한 그 분의 책을 읽고 나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한껏 흥취를 돋우는 풍물놀이를 보는 듯했다. 따라서 선생은 내 인생에 있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신 고마운 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내 서가에 꽂혀있는, 애지중지하는 수많은 책들. 예전에 발표했던 ‘책과의 인연’이라는 작품에서 밝혔듯이 숱한 세월 속에 내 입김과 손때, 그리고 따뜻한 애정의 눈길이 묻어있는 것들이다. 그들은 나와 고락을 같이해 왔다. 죽음보다도 더 무서웠던 가난이 생각나고,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분노와 실의, 좌절로 방황하던 때가 눈에 밟힌다. 혹은 인생에 대하여 허무와 회의를 느낀 나머지 어디로 훌쩍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을 때, 아니 그러한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 나는 책을 더욱 가까이했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요, 도피처였다.
그들은 나를 외면하거나 냉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쌍수로 반갑게 대하며 명철과 지혜를, 위로와 평안을, 용기와 희망을 가뭄에 단비처럼 안겨주었다. 또한, 갈 곳 몰라 헤맬 때도 그들은 자진해서 내 발등의 등불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내 삶에 있어서 위대한 스승이요, 친절한 반려자였다. 내가 지금까지 숱한 역경을 이기고 꿋꿋하게 살아온 것도 그들이 한몫을 했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내 독자적으로 일구어내었던 일 중에 하나가 있다. 다름아닌 기독교 경전인 신약 및 구약을 합쳐 1,752쪽이나 되는 성경을 2년 1개월에 걸쳐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대학노트 열 권에 이르는 필사를 끝마쳤던 일이다. 그때 맛보았던 가슴이 벅찬 삶의 보람과 긍지. 군색함과 초라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을 뿐더러 자신에게 과히 엄격하지 못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꿈꾸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자탑이었다. 나는 그것을 통하여 기름진 문학적 향기를 맛볼 수 있었고, 혼자서 해냈다는 것에서 삶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갖게 된 내 좌우명이 하나 있다. ‘절벽이 보이면 희망은 있다’라는 것이었다. 무슨 상황이 닥쳐도 일단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과연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워하여 망설이거나 주저앉기보다는 어떻게든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다스려 나가는 법에 길들여지고 싶었다. 그러자면 당연히 낯선 것에 친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로 험난한 세파를 헤쳐 나가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질풍경초(疾風勁草)’ 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뜻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즉, 내가 나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일에 목표를 둔 꼿꼿한 신념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정신을 불태울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남모르게 피나는 연습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자 나는 장님이 눈을 뜨듯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세월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나만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드넓은 곳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가고 싶다. 그것이 나를 한 뼘 이상 키우는 게 아닐까. 무릇 삶이란 배우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음식을 골고루 맛보듯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성경 필사가 내게 준 커다란 교훈이었다.
그 이외에도 작품 ‘덤으로 사는 인생’에서 밝힌 바 있지만 세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고비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들. 그 분들 덕택에 나는 덤으로 이제까지 살아왔으니 그 은혜를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또 고등학교 때 우리 집의 가난한 형편을 알고 입원비를 일체 받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어머니에게 소고기 한 근이라도 사 가지고 가서 나에게 끓여 주라고 돈을 쥐어주던 형님 같은 의사 선생님, 그리고 문학을 하는 나를 부러워하며 상을 받을 때마다 축하의 꽃다발과 선물을 안겨 주던 이웃들…….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봐 주기도 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 여간 흐뭇한 게 아니다.
몇 년 전에 감명 깊게 읽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개미’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그 책은 어떤 사물이든지 간에 따뜻한 애정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하면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며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즉,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고마운 분들이 베푼 은혜에 능력이 닿는 한 보답해야겠다는 것과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위해 앞으로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등등을 곰곰이 헤아리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기조차 했다.
그때 떠오른 게 성경에도 나오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원망과 불만으로 얼룩진 가난한 시절을 이리 돌고 저리 돌며 살아오다 보니 기쁘거나 즐거운 추억은 별로 없고, 한(恨)이 범벅처럼 뭉쳐 있는 기억만이 늘 나를 사로잡았다. 이러니 하루하루를 살아도 통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미래에 대한 한 줌의 희망마저 갖지 못했다. 그저 나만의 좁은 울타리에서만 매돌 뿐이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나와는 동떨어져 있는 양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의 정체성을 찾는 일환으로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고, 초창기의 발표 작품은 온통 가난한 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삼기가 다반사였다. 어느 정도 내 가슴속에 덩어리져 있던 한이 서린 일들이 작품으로 실처럼 풀리며 걸러지자 가슴이 확 트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내 이웃과 사회 쪽으로 눈을 돌리며 소재를 구하고 작품으로 발표하게 되자 그때서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절실하게 사무쳐오는 게 아닌가.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볼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이 한량없이 부끄러웠다.
이리하여 얻게 된 것이 ‘역지사지’와 겸손이었다. 세상일이 내 뜻과 같지 않다고 해서 벌컥 화를 낼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 발짝 물러나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올바른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알곡이 쥐어지는 게 아닌가. 이리하여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나의 힘이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서슴없이 달려가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즉,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잊어버리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았으면 잊지 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보답하라는 채근담에 나오는 명언은 더욱 큰 힘이 되었다.
그 이후 나누고 베푸는 삶에 실천궁행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무슨 일이든 내 힘을 필요로 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기꺼이 응하고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왔다. 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때마다 내 덕분이라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접하면서 세상은 때때로 나의 힘을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달리 생각하면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내게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또, 나는 그것을 통하여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으니 가히 일석이조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의 세상은 너도나도 나만 좋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가 지배적이다.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할지언정 박수를 치거나 칭찬하기에 너무나도 인색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일은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삭삭 빠져나가는 다분히 실리위주로 치닫는 비겁하게 살기가 판을 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니 이에 날로 삭막해지는 인심 앞에 혀가 내둘러지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것을 바나나 껍질을 벗기듯 소신 있게 꼬집으며 글을 쓰는 입장이지만 착잡해지는 마음 가눌 길 없다.
‘인생이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러시아 문호 체홉의 격언이다. 나도 세월의 여러 구비를 돌아 지천명을 아는 나이에 들어섰다. 반평생을 보낸 셈이다. 나름대로 맛 좋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부지런을 떨며 살아왔다. 그 중에는 덧없이 흘려 보낸 듯 아쉽고 후회스런 세월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엎질러진 물에 미련을 갖는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제는 보다 나은 창조적인 내 삶을 위해서 노력할 때이다. 리듬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삶. 그것이 정작 필요한 것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보람과 긍지를 맛볼 수 있는 진정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남을 돕고 베푸는 징검다리 역할에 힘을 쏟아야겠다.
서두에 언급한 징검다리가 있는 곳에도 변화가 왔다. 작년 9월 7일부터 안양시청 주관으로 징검다리가 놓인 데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져 병행하여 시행된 ‘인덕원 내 대우아파트 앞 보도교 설치 공사’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 보도교가 완공되면 시민들의 불편 해소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왠지 편하지 않다. 왜냐하면 편리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보도교를 놔두고 굳이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려 고집하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우뚝 선 보도교와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철저히 외면당할 징검다리. 결국 편리 제일주의 앞에 또 하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구나 하고 조급은 씁쓸해지는 요즈음이다.
오늘도 ‘학의천’ 냇가로 나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저런 모습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상하자 흡사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마땅히 건너가야 할 목적도 없는데 냉큼 징검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06년 7월)
댓글목록 0
오윤제님의 댓글
보도교보다 효용은 떨어지더라도 가치는 비교될 수없는 징검다리 다리하니 배다리가 얼핏 생각납니다.
윤인문(74회)님의 댓글
우곤이! 참 오래간만일세..난 누구보다도 한동안 잊어버렸던 우곤의 징검다리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네.*^^*
윤용혁님의 댓글
선배님을 통해 어떤 시련이 와도 질풍경초처럼 흔들림없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겸손의
미덕을 배워 남을 돕고 베푸는 징검다리가 되겠습니다.
선배님의 좋은 글에 느끼는 바가 컸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인문님이 마니 기다렸습니다..우곤님이 70기수와 80기수의 징검다리역할 하실겁니다..긴머리소녀도 생각나네..
이동열님의 댓글
인문님과 우곤님이 징검다릴 놔주세여^^
공관규님의 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느끼는 바가 크군요. 성실..
고희철(74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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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곤동기 홈피 재 등단을 축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