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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외할머니의 웃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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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외할머니의 웃음소리
나이 삼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가지 않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추석날 강화 고향집에 내려갔더니
“애야,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강화읍에 참한 색시 감이
나타났으니 이번에는 군소리 말고 한번 만나나 봐라.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네 애미 말을 그렇게 죽어라
안들을 거냐? “
나는 귀찮은 듯 “어머이, 나도 시골촌놈인데 강화 양순이가
오죽하겠어요? 안 만나요!“ 하고 귀찮은 듯 짜증을 내니
“관둬라 이놈아! 네 놈이 장가를 가든 말든 난 인제 모르겠다.
이제 나도 지쳤다.“
어머니의 최후통첩 같아 “알았어요. 만날게요.”
한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007 제임스본드의 첩보영화처럼 어떤 양복에 무슨 옷을 입고
서울 정동에서 둘만이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나가려는 데
사전에 약속된 하나뿐인 신사복 바지의 지퍼가 오늘따라 죽어라
올라가지 않아 초를 칠하고 한참을 낑낑거리며 진땀을 뺐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약속시간은 바락 다가오고 에이 나가지 말까하다 어머니께서
전에 하시던 방법이 생각나 고장 난 지퍼의 중간 부분을 실로 꿰고
지퍼를 올리니 그럴 듯하게 남대문을 잠글 수 있었다.
부리나케 나가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 아주 친숙한 이미지의
전혀 기대하지도 않던 미모에 여인이 살짝 웃음을 머금고 내 앞에
나타났다.
“어라 강화에도 이런 진주가 개천에 숨어 있었네.”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터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려 별로 재미없는 말에도 헤헤
거리니 인간이 그렇게 간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의 웃음소리는 정말 체통이 없어 보였다.
“제가 교회에서 낡은 피아노를 쳤는데요. 글쎄 건반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듣던 나는 ”헤헤헤 그래서요? 헤헤 아이고 재밌어요.“
속을 다 빼주고 있었다.
자칭 킹카라 우기며 그 콧대 높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운동이 뭐예요? 네? 저요? 헤헤헤 숨쉬기 운동이요.”
그 무슨 철 지난 개그란 말인가?
다음 주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다 가도록 그녀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지쳐 쓸쓸히 홀로 자취하던 수원 집으로
갈까하다 엄청 상한 자존심을 위로받고자 부천의 형님 댁으로 내려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오히려 형이 바람 맞은 양 흥분하여 더 날 뛰었다.
아니 도대체 학교 여선생이라는 작자가 약속을 어겨 마음 여린 동생의
자존심을 그렇게 구기다니 가만히 안 두겠다는 것이다.
깡패를 시켜 혼을 내 주거나 내일 아침 교장실에 전화를 걸어 뭐 그따위
선생이 다 있냐고 망신을 주겠다며 난리법석을 떠니 오히려 말한 내가
더 머쓱해졌다.
가까스로 형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결과가 몹시 궁금하셨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이 애써 어머니께 설명을 드리니 전화를 끊고 기다리라 하신 후 얼마
안 있자 그녀로 부터 날 찾는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못 나온 이유인 즉, 해병 군악대퍼레이드에 고교 밴드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그랬다는 것이다.
막상 그녀의 전화를 받고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의 속상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행사참여보다도 남자의 첫 인상이 오종종하고
웃음소리가 너무 체살 머리가 없어서 자존심이 결여된 사람 같아
나가기 싫었고 이미 마음속으로 퇴자를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웃음소리가 오히려 맞선을 볼 때 마이너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와 종친인 처이모들의 후한 점수와 남자가 착해 보인다는
장모님의 높은 점수로 운 좋게 만난 지 오십일 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강화읍 성당에서 올렸다.
전립선암으로 6년째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투병중이면서도 유머와
익살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사시는 처갓집 처외삼촌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늘 유쾌하게 만들었다.
아픈 가운데도 처이모인 시집들을 간 여동생들의 궂은일을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잘 처리해주고 홀로된 노모를 끔찍이 모시며 늘
긍정적인 사고와 특유의 웃음소리를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자 이런” 하며 호탕한 웃음을 지을 때면 처외가의 가족모임에
감초이자 청량제가 되었고 형제간의 우애를 몸소 실천하는 정이 참
많은 분이셨다.
오랜 투병생활로 이가 성치 않아 틀니를 하셨는데 그분의 큰 누님이시자
나의 장모님 회갑을 차리는 대신 처외가의 모든 식구와 설악산에
모처럼 놀러갔다.
숙소의 아침이 밝아 일어나니 처외삼촌은 집 사람에게 빙그레 웃으며
다가가 “네 외숙모가 밤새 엿을 고드라.” 하였다.
집사람은 아주 놀라며 “아니 여기까지 놀러 와서 왠 엿을 곤다니꺄?
설도 아닌데? 세상에 별일 다 보겠시다.“
그랬더니 처외삼촌은 “자 이런 우하하하” 그 특유의 호방한 웃음소리를
내며 또 한바탕 뒤집어 지셨다.
알고 보니 진짜 엿을 고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나님이 밤새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곤 것을 그렇게 놀리셨던 것이다.
이에 질세라 처 외숙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나 원 참, 저 양반이 글쎄 얼마 전 저녁에 나랑 서울에 좀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데 의경 하나가 음주운전 단속을 위해 차를 멈추게 하더니
음주감지기를 들이 밀자 후 하고 분다는 것이 너무 세게 불어 틀니가
통째로 튕겨나가 감지기를 때리지 뭐니꺄?
너무 깜짝 놀란 의경이 땅에 떨어진 저 양반 틀니를 주워 털어주며 아휴!
괜찮으세요? 너무 세게 부셨어요. 아저씨! 하며 킥킥거렸시다.
나 원 창피해서 어디 같이 다닐 수가 없시다.
말도 말아요. 엊그저께 저녁에는 요. 화장실에서 날 놀리며 웃다 글쎄
돌아가는 변기에 틀니를 빠트려 몽땅 잃어버릴 뻔 했시다.
저 양반 지금 물고 있는 저 틀니가 바로 그것일시다.“
아주 순무 냄새나는 구수한 강화사투리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고는 혼자
“키키키키”하며 튜브에서 바람 빠지듯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셨다.
상쾌한 설악산의 아침이 각자 고유의 웃음소리로 메아리쳤다.
그러나 처 외할머니만큼은 이 자리에 같이 하지 못한 머나먼 미국 땅
막내아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계셨다.
이십년 전 사업실패로 국내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셨다.
결국 장모님을 비롯한 딸들은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처 외할머니께서
자나 깨나 그리던 막내아들이 사는 미국행 비행기 표를 사드렸다.
대동한 두 딸과 가는 미국 길은 아주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그런데 팔십이 가까운 노구에 혈압까지 놓으셨던 처 외할머니는 꿈에
그리던 막내아들을 보자마자 극도의 흥분으로 쓰러지셨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큰 변을 당하신 것이다.
막내아들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911에 신고하며 몸서리쳐 울었다.
“어머니! 어머니! 제가 죄인이에요.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하세요.”
뉴욕의 하늘도 따라 울었다.
그래도 미 병원 측의 신속한 응급조치로 위기를 넘기셨으나 중풍으로
전신이 마비되었고 간신히 울거나 웃는 정도 외에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미국을 방문한 고령의 외국인에 대한 그들의 친절과 배려로 십여 일간의
입원비등 제반 비용을 물리지 않고 귀국 행 비행기 안까지 간호사를
대동하여 휠체어까지 무상으로 줘가며 극진히 모시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모 항공사도 환자의 편의를 위해 여러 개의 비행기좌석을 내주었다.
국내에 돌아오신 처 외할머니는 딸들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임종의 시간을 맞게 되었다.
막내아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모여 마지막 가시는 그 분의 모습을
엄숙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숙연한 방안의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뽕” 하는 방귀소리였다.
바로 범인은 울고 있던 당신의 둘째딸이 생리현상을 못 참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방귀쟁이였다더니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져 눈치들을 보고 있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처 외할머니께서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호호호”하고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하는 둘째딸의 방귀소리를 인지하고
웃으셨던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웃으실 수 있다니.....
그 웃음소리는 장기투병중인 아들에게 절대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격려의
메시지 같았다.
아! 지금도 나는 처 외할머니의 그 웃음소리를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인자하고 가족의 화목을 늘 강조하시던 그분의 마지막 웃음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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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성(70회)님의 댓글
전립선===> 친근감 가는 용어인데..토욜..인문님/용혁님은 인주옥에..나는 아내곁에..男들은 몰라..주말부부의 애환을..
이환성(70회)님의 댓글
어디선가나를부르며 다가오고있는것같아~ 돌아보면아무도없는 쓸쓸한『꼬리터』...그래서 빗물을 주제가로...
윤인문님의 댓글
<EMBED style="WIDTH: 540px; HEIGHT: 50px" src=http://www.kumsunsa.com/data/music_board/011121291.mp3 width=540 height=50 type=audio/mpeg loop="-1" volume="0" autostart="true" showstatusbar="-1"> <br> 김동아 - 꽃잎처럼 지노라
오윤제님의 댓글
怒 喜 樂 哀이 정말 곷잎처럼 피고 지네요.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고 ....
장재학님의 댓글
어린아이처럼 “호호호” ---> 인고 선후배님들의 마음도 어린아이,할머니,할아버지의
선한 마음일것이라고 믿습니다.
73박홍규처님의 댓글
마지막 순간의 일이 눈앞에 선하군요....가슴이 너무 저려오네요...
이진호님의 댓글
항상 선배님의 진솔된 글이 가슴을 저리게하고 때로는 웃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