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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기 3 : 에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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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4일째..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그리이스로부터 여행을 마치고 첫날 묵었던 호텔에서 짐을 또다시 싸들고 버스로 아침 8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자 다시 어제 저녁에 도착했던 아타투르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이 공항에서 우리는 8시에 출발하는 터키 국내 항공편으로 이스탄불 남쪽 지중해 연안의 이즈밀로 향하였다. 이즈밀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로 로마제국에 속한 아시아, 터키 서부지역의 중요한 도시이며, 카이스테르강 하구에 있던 항구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거대한 상업,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에페소를 관광을 서둘렀다. 에페소라는 도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나도 좀 헷갈릴 정도다. 라틴어로는 Ephesus, 그리스어는 Έφεσος, 터키어는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한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불리우는 에페소로 부르기로 한다.
에페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였으며, 고대 기독교 전도의 중심지였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는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인구가 30만명 이상으로 불어남으로써 에페소는 초기 기독교인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바울은 2,3차 전도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으며, 3차 전도여행시에는 2년이나 머물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페소에서 썼다고 한다.
에페소는 지금은 폐허 같은 유적만 있는 곳이지만 원래는 역사가 유구한 도시였다. 에페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끝 카이스테르 강이 지중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BC 11세기 아테네의 안드로클레스가 이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출하였다. 그가 아테네를 떠나기 전 델피 신전에 나아가 신탁을 받았는데 “물고기와 멧돼지와 불이 만나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이 나왔다. 안드로클레스 일행이 에페소 지역을 지나다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물고기를 불에 구워 먹다가 불똥이 튀어 숲으로 번져 산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게 되었다. 그 때 산속에 있던 멧돼지가 튀어 나왔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신탁에서 말한 장소라고 말하고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에페소는 그 후 발전을 거듭하며 번성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지배자는 다양하게 변하였다. BC 564년의 페르시아→ BC 334년의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대왕이 죽은 후 부하 장군인 리시마크스의 지배→BC190년의 페르가몬 왕국→BC 1세기 이후 로마의 지배로 이어졌다. 줄리어스 시저 사후인 BC 33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서로 적대하고 있을 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하고 그 당시 이 지역 최대의 도시이며 휴양지인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와서 쇼핑을 하고 휴식을 했다고도 한다. 에페소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시절 더욱 번성하여 소아시아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제국 5대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세기경 하천의 토사가 쌓이면서 바다에서 멀어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고 더욱 결정적으로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유령도시, 잊혀진 도시가 되고 약탈과 파괴의 대상으로 황폐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에페소에 도착 유적지의 두 개 출입구 중 남쪽출입구에서 시작하여 유적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고 한다. 이 도시유적지는 자세히 살펴보려면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제일먼저 가이드로 에페소 유적지 안내판앞에서 설명을 듣는데 자세히 보니 안내판 오른쪽 밑에 samsung로고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다시한번 더 우리 국력 신장의 한 면모를 보는 듯하였다. 에페소와 그 주변에 있는 유적은 아르테미스 신전처럼 BC 330년대의 유적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AD 1세기에서부터 5세기에 걸쳐 건설된 것들이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에페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였으며, 고대 기독교 전도의 중심지였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는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인구가 30만명 이상으로 불어남으로써 에페소는 초기 기독교인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바울은 2,3차 전도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으며, 3차 전도여행시에는 2년이나 머물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페소에서 썼다고 한다.
에페소는 지금은 폐허 같은 유적만 있는 곳이지만 원래는 역사가 유구한 도시였다. 에페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끝 카이스테르 강이 지중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BC 11세기 아테네의 안드로클레스가 이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출하였다. 그가 아테네를 떠나기 전 델피 신전에 나아가 신탁을 받았는데 “물고기와 멧돼지와 불이 만나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이 나왔다. 안드로클레스 일행이 에페소 지역을 지나다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물고기를 불에 구워 먹다가 불똥이 튀어 숲으로 번져 산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게 되었다. 그 때 산속에 있던 멧돼지가 튀어 나왔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신탁에서 말한 장소라고 말하고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에페소는 그 후 발전을 거듭하며 번성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지배자는 다양하게 변하였다. BC 564년의 페르시아→ BC 334년의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대왕이 죽은 후 부하 장군인 리시마크스의 지배→BC190년의 페르가몬 왕국→BC 1세기 이후 로마의 지배로 이어졌다. 줄리어스 시저 사후인 BC 33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서로 적대하고 있을 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하고 그 당시 이 지역 최대의 도시이며 휴양지인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와서 쇼핑을 하고 휴식을 했다고도 한다. 에페소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시절 더욱 번성하여 소아시아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제국 5대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세기경 하천의 토사가 쌓이면서 바다에서 멀어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고 더욱 결정적으로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유령도시, 잊혀진 도시가 되고 약탈과 파괴의 대상으로 황폐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에페소에 도착 유적지의 두 개 출입구 중 남쪽출입구에서 시작하여 유적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고 한다. 이 도시유적지는 자세히 살펴보려면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제일먼저 가이드로 에페소 유적지 안내판앞에서 설명을 듣는데 자세히 보니 안내판 오른쪽 밑에 samsung로고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다시한번 더 우리 국력 신장의 한 면모를 보는 듯하였다. 에페소와 그 주변에 있는 유적은 아르테미스 신전처럼 BC 330년대의 유적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AD 1세기에서부터 5세기에 걸쳐 건설된 것들이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비록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의 일부만 보이나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고 이 후 비잔틴 시대에는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하였다고 한다. 누가의 묘에는 한국어 안내판도 있는데 여기서도 우리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곳을 지나면 작은 원형 극장과 같이 생긴 곳이 오데온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보통의 야외극장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상부에 지붕이 덮여 있었는데 연극 공연 뿐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데온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밑 부분은 13줄, 윗 부분은 10줄의 좌석을 배치했으며, 1500여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오데온 위로는 천장을 만들어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알 수 없고, 마치 작은 원형 극장의 모습이다. 이 오데온은 수차례에 걸쳐 개보수를 거쳤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따른 각기 다른 건축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오데온 앞에 붉은 토관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토관들이 2200년전 로마시대에 사용했던 상수도관이라고 한다. '오데온'의 좌석에 앉으면 무대 뒤편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서있는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다. 이 곳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의 석상이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에 국영 아고라의 북쪽 광장문이던 것이 바실리카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기둥의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없고, 기단과 기둥의 일부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곳은 화폐를 교환하는 곳으로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AD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165m에 이른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그 기둥의 머리는 황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오데온 옆에는 바리우스의 목욕탕 유적이 있다. 목욕탕은 폼페이와 같이 온돌형 구조로 되어있는데 우리나라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 목욕탕은 냉탕,온탕,증기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니 발달된 당시 로마의 목욕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중 화장실 쪽에서 본 목욕탕. 중앙의 풀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목욕탕 옆에는 벽을 따라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데 1세기에 세워진 에페소의 수세식 공중화장실이다. 중앙에 사각형의 풀장이 있고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있다. 수세식 변기가 유달리 조밀한 것은 당시 대화를 중요시하고 즐겼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가이드말이 그 당시 이 화장실이 유료였으며, 겨울에는 볼일 보기전 노예들이 따뜻하게 데펴놓았다는 에피소드도..ㅎㅎ..우리나라 수세식 화장실 이용한 게 얼마 안되는데...내 고등학교때도 푸세식이었는데...에페소 사람들은 2천년전부터 최첨단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요금도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과 흘러 나가는 곳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하며, 돈을 많이 내면 볼 일도 냄새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화장실 앞에도 물이 흘러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손도 씻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악사들이 화장실 앞에서 음악도 연주했다고 하니 그 시대 사람들의 대단한 생활상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옆에는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플레타네이온' 시의회당이라고도 하는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다고 한다. 당시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던 아궁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에페소 일대는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발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곳 보수공사수주를 맡은 사람은 평생 먹고살겠지 하는 생각도..ㅎㅎ.. 공사 현장 뒷편 코린트식의 열주 위에 선 석상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조차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도미티안 신전'터 옆에 있는 동상 받침대에는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를 말함)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에페소 안의 모든 도로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아름답기도 하지만 빛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상이나 유적들이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인데 방대한 지역에 유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거의 방치된 느낌마저도 들 정도이다. 지금은 무너진 유적지지만 그 옛날 그들의 생활상이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가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로마의 황제들이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건축물을 보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헤라클레스 문을 통해 평민과 귀족을 구분했다고 하니 역사는 역시 있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을 느꼈다.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인데 왼손에는 면류관을,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래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는 바로 니케 여신의 옷자락 선(좌측 하단)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니케"의 돌부조는 원래 헤라클레스 문아치 장식이었으나 무화과나무 옆 땅에 그냥 내려져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있으니 역사의 뒤안길에서 세월의 무심함을 느끼게 하였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서면 메인 스트리트인 '크레티아 거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 '셀수스 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셀수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 '크레티아 거리'는 당시 길 양쪽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많이 소실되었지만 현재도 몇 개는 구경 할 수 있다. 이렇게 머리가 유실되고 몸체만 남은 석상이 너무나 많은데 예전에는 석상의 몸체만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서 석상 몸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장난기 많은 관광객들은 대리석상 뒤로 올라가 석상의 몸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크레티아 거리' 중앙의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은 본래는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샘 중앙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다.
부유한 상인들의 아케이드 거리의 모자이크화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길바닥 조차도 이렇게 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에페소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점 안에는 로마의 여러 속국에서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2층 개인 빌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색과 문양의 조화 또한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다. 여기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선물을 사주었다고 하던데...사실인지? 입구 중앙에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서있고 한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있는 아치로 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하드리아누스 신전'인데 AD138년에 완성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치 앞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있고 뒤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있는데 사진은 메두사의 조각이다.
크레티아 거리를 계속 걸어가면 너무나 아름다운 '셀수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에페소의 상징'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셀수스 도서관'은 로마 시대 집정관 셀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위에 세운 기념물인데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제 3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기둥과 벽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으며 정면의 벽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여신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파사드 뒤에는 목조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또 지진 피해도 입어서 현재는 건물의 앞부분만 남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은 유적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으며 복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오른 쪽의 아취형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은 상업 아고라로 내려가는 문이다. 도서관 옆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상업 아고라'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을 찍었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도서관 바로 앞의 '대리석 거리' 벽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부조 장식물도 눈에 뜨인다. '대리석 거리'는 '셀수스 도서관'과 '원형대극장'을 이어주는 거리를 이른다.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터키의 유적지는 어딜 가든 고양이의 천국이라 이렇듯 '대리석 거리'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많은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대리석길을 걷다가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바닥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사람들이 빠져 나간후 바닥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의 문양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광고 인셈이라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로마시대 에페소에 있던 창녀촌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돈을 가지고 오라는 뜻이며, 발자국 표시는 방향 표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에 출입금지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그 당시에도 성매매가 이루어졌으니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나보다..ㅎㅎ..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대리석 거리의 끝부분에는 2만 5천명 정도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던 터키 최대 규모의 '대극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AD 3세기에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건립된 이 대극장의 관객석은 높이 38m, 길이 158 m의 반원형 모양인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극장 안 무대 위에 서니 마치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듯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여기서 우리 같이 갔던 일행 한명이 무대위에서 객석에 앉은 우리들에게 노래를 두곡씩이나 선사하는게 아닌가? 그 노래 소리를 들으며 그 당시 꽤나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과학적으로 설계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가 38m나 되다 보니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이다. 그곳을 나오니 아치 문 앞에 늘어선 열주를 따라 '상업 아고라(시장터)'가 이어지는데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되어있는 아고라는 에페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아고라는 카라카라 황제 시대에 벌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한다.
이 아고라에서는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산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으며 '항구 거리'를 통하여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와 연결된 '항구 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길이 500m 정도의 거리이다. 항구 거리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아르카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 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페소의 현관이다. 항구 거리 아고라의 끝에는 에게해가 있어 상선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하구의 토사가 점점 쌓이게 되어 바다가 점점 메워지다보니 지금은 유적지에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항구 거리를 마지막으로 에페소 유적지를 나서니 에페소 북쪽 출입구 밖에는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 국립공원 같은 데에 늘어선 상점과 그 느낌이 너무 흡사해서 너무나 친근감이 들었다.
이 에페소를 관광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상당한 분량의 유적들 속에서 당시 화려했던 로마의 도시생활을 엿볼 수 있었고 고고학 유적지의 규모로는 세계에 다른 적수가 없는 여기는 모든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곳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버스로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을 가진 파묵깔레로 향했다 에페소에서 파묵칼레까지 2시간여 달려가면서 차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비옥하고 기름진 농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목화밭..올리브밭..귤밭..말그대로 그것들의 천지였다고나 할까? 파묵깔레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 호텔에서 모처럼 온천욕을 하면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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