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발표작 - 메모하는 즐거움
본문
메모하는 즐거움<?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진 우 곤
내 생활의 한 축은 메모하는 즐거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뜻 떠올라 놓치고 싶지 않은 멋진 생각이나 느낌이 있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 가만 있질 못 한다. 길을 가다가도 그렇고, 밥을 먹다가도 그렇다. 아니, 흔들리는 버스나 복작거리는 전철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잠시 짬을 내어 몸에 푹 배어버린 메모에 손을 적시고야 만다. 설사 몇 줄 안 되는 기록일지라도 상관없다.
메모장에 담기는 것은 그날그날의 중요한 사건이나 행적은 물론 어떤 사물을 대하고 받는 경이나 감동 혹은 집필에 필요한 것 등등 다양하다. 이렇듯 수시로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기록은 일기를 쓰거나 나중에 집필할 때 당시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있어서 안성맞춤이요, 향후의 생활 계획 등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되어 매우 효과적이다.
따라서 나의 메모하는 일은 누가 억만 금을 준다 해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에게 메모하는 즐거움을 빼앗긴다면 구속을 당한 양 숨이 막혀 한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이러매 내 메모장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금은보화와 같다. 아니, 일종의 내 정신이 거처하는 소중한 집이요, 소우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고 보니 나는 혼자 있어도 별로 무료함을 모른다. 펜과 메모장만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자투리 시간마저도 헛되이 흘려 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자투리 시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구와 만날 경우 약속 시간보다 일찌감치 나가서 기다리는 편이다. 첫째는 상대방이 늦게 나오든 말든 일단 약속을 지킨 게 되니 홀가분하고, 둘째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이라도 사색에 잠기며 메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니 추호도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
이렇듯 메모하는 일이 고벽(痼癖)에 가까울 정도로 일상화된 것은 문학에 뜻을 두면서부터였다. 그것도 이러구러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렇고 보니 애써 기록한 메모장을 분실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로서 그럴 때면 맥이 쭉 빠지고 가슴조차 덜컹 내려앉는다. 아니, 하늘조차 노래질 정도로 낙심천만이다. 물론 거기에 담은 기록을 대충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순간적으로 포착한, 세밀한 생각과 느낌에 근접하기가 손 안 대고 코 풀기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다. 미상불 그것을 더듬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그로 인하여 일기를 쓰거나 작품을 쓸 때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떨떠름하기 짝없는 일이다. 하여 지금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메모장에 담긴 기록을 틈틈이 컴퓨터에 저장하는 수고를 병행하기도 한다.
언젠가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여름 휴가를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바삐 서두르는 바람에 많은 기록이 담긴 메모장을 잃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디서 분실했는지 몰라 애가 탔다. 마음도 공중에 붕 떠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둘째 처남댁이 집에서 찾았노라며 그걸 등기우편으로 보내주는 바람에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대하자 흡사 집 나간 개가 돌아온 양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이런 터라 항상 어디를 가나 펜과 메모장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화장실에 갈 때도 그렇고 하다못해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데를 갈지라도 그렇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두어야 안심이 된다. 이는 혹시라도 멋진 착상과 관련된 일을 꿈꾸게 되면 깨자마자 달아나기 쉬운 그것을 꼭 붙잡기 위해서다.
따라서 메모 도구를 챙기지 않으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이요, 혹은 장사 지내러 가는 놈이 시체를 두고 가는 듯한 나의 불찰에 혀를 차기도 한다. 하여 도로 집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챙기고 나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열일 제쳐두고 부랴부랴 인근의 문방구부터 찾아 들어가야 중요한 약속이라도 지킨 듯 한시름을 놓게 되는 것이다. 이는 메모하는 즐거움을 하시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욕구의 작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메모하는 일에 매양 즐거움만 따르는 게 아니다. 불편하거나 번거로운 부분도 있다. 메모장을 지니고 다니자니 우선 상의의 호주머니가 많고 적음부터 신경을 쓰는 게 버릇이다.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흐뭇하다. 왜냐하면 넣고 다닐 메모장이 한 권이라면 별 문제가 없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두세 권의 메모장에다 포켓용 책이라도 한 권 넣고 다니자면 사정이 영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나를 위해 기껏 사 준 옷이 아무리 근사해도 호주머니가 의의로 적으면 별로 달갑지 않다. 심하면 그의 성의도 무색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것으로 바꿔 오라고 이를 때도 있다. 설령 이왕 샀으니 어쩌겠느냐고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입는다손 치더라도 호주머니가 적으니 자연 불편하여 즐겨 입지 않게 된다. 이렇고 보니 아내도 내 옷을 살 때만큼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의 많고 적음부터 가리게 된다는 게 아닌가.
또 계절을 타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사계절 중 여름철은 내게 마땅찮다. 대개의 경우 반팔 와이셔츠나 간편한 점퍼를 입게 되니 자연 호주머니가 적은 차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즈음은 아예 속 주머니가 없는 점퍼가 유행이라니 더욱 기껍지 않다. 이러매 결국 메모장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지갑을 비롯하여 열쇠꾸러미, 휴대폰, 손수건, 기타 필요에 따라 포켓용 책까지 넣게 되니 앞뒤가 불룩하여 옷을 입은 맵시도 안 날 뿐더러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겁기 한량없다. 혁대를 풀기만 하면 바지가 줄줄 흘러내리기 다반사다. 간혹 가다가 그런 불편을 다소나마 덜려고 여름 양복을 꺼내 입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런 불편함 때문에 손에 익은 메모하는 즐거움을 뿌리칠 수는 없다. 메모는 내 삶을 보다 더 옹골차고 튼실하게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그것은 능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되어 온 생활의 패턴이니 하루아침에 칼로 무 자르듯 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먼 훗날 내 유언 속에는 이승에서 못다 누린 메모의 즐거움을 저승에 가서도 누리겠다며 펜과 메모장을 반드시 넣어 달라고 써넣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세상은 호두 속처럼 복잡하고 변화가 많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 또한 예전만 같지 못한 세월이다. 이러매 다소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더라도 메모가 더없이 유용하다 아니할 수 없다. 아니, 더욱 아끼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거기서 나름대로의 이치를 궁구하려는 나의 생활 자세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내와 나들이를 가던 중 비단결처럼 곱게 물든 노을과 맞닥뜨리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지한 펜과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뭔가 좋은 착상이 떠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하다못해 내 호흡이 묻은 단 한 줄의 문장을 얻을지라도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유열을 맛보지 않겠는가. 동행하는 아내가 그런 기색을 아는지 뭐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느냐고 물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월간문학 7월호)
댓글목록 0
윤인문님의 댓글
요즘은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