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수제비
본문
윗말 밭에 심어 놓은 보리와 밀이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였어요. 황금벌판은 머리채를 풀어 바람에 서걱거리다 메뚜기를 날렸죠. 사래 긴 밭에 열기를 피해 쉬던 개구리가 인기척에 놀라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었죠. 산 밑 밭이라 가끔 밀애를 즐기던 장끼가 소리를 지르며 푸득 날아올랐어요. “푸드덕” “꾸엉 꾸엉” 메아리는 잠든 산을 깨웠죠. 암놈은 수줍어 허둥지둥 기어가고.. 아마 과년한 살무니 동네 처녀총각들을 흉내 내는지도..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시고 낫으로 밀과 보리를 벤 다음 단을 묶었어요. 기를 쓰시는 어머니의 힘줄이 햇볕에 그을려 더욱 검게 보였죠. 그루터기가 남아 길게 늘어진 이랑이 운동장에 그려진 육상트랙 같았어요. 밀과 보릿단을 일일이 날라 앞마당에서 타작을 하였죠. “윙윙” 탈곡기도 돌리고 “탁탁” 도리깨질로 두들겨 낱알을 건져내고 바람개비를 돌려 검불을 날려 보낸 다음 나락을 자루에 담았어요. 탈곡한 보릿단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하얀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구수한 냄새가 참 좋았어요. 포근함이 꼭 어머니의 젖가슴에 안긴 듯 행복하였죠. 수확한 밀을 존강리 방앗간에서 곱게 빻아 밀가루로 만들었어요. 발그레한 밀이 어찌나 하얀지 신기하더군요. 그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밀거적을 잘 매셨어요. 뽀송뽀송한 밀거적.. 아버지만의 작품이셨죠. “애! 용대야, 앞마당에 밀거적 펴라.” 부엌에서 수제비를 한 솥 끓이신 어머니의 명령이셨어요. 아까부터 어머니가 열심히 밀가루를 반죽하시더니 빵을 찌시려는 것이 아니라 수제비를 만드셨군요. 감자도 숭덩숭덩 썰어 넣고 수제비를 큼직하게 뜯어 간장으로 간하시어.. 저녁식사 대용으로 온가족이 둘러 앉아 뜨거운 수제비를 입으로 “호호” 불며 열무김치를 얹어 모두가 땀을 흘리며 맛있게 먹었어요. 저녁을 물리고 나면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외포리 앞바다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었어요. 구름발치에 떠 있던 수평선의 새우젓배도 하나 둘 돌아오고 반딧불도 옹기종기 등불을 밝힐 때면 밀거적을 대문 밖 큰 마당에 깔았지요. 큰 마당에는 살피를 위해 심어진 커다란 죽순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죠. 밀거적에 누워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제일 먼저 북두칠성을 찾았어요. 동생도 찾았다고 난리를 칩니다. 오리온자리도.. 전갈자리도.. 옆집의 붙임성이 좋은 시갑이가 영락없이 놀러왔어요. 왜냐면 가끔 어머니가 간식으로 찌워주는 감자나 간간히 급식용 분유를 밥 지으실 때 찐 것을 얻어먹으러 오는 것이 분명했어요. 고소하지만 너무나 딱딱해 이가 부러질 정도의 노란색 분유 찐 것을.. “어서 와라. 너희 둘이 팔씨름 좀 해봐라.” 아버지가 공정히 심판을 보시며 동생과 시갑이의 팔씨름을 시켰어요. 동생과 시갑이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용을 썼어요. 그런데 갑자기 시갑이의 엉덩이자락 쌍바위 골에서 요상한 가죽피리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어찌 들으면 바짓가랑이의 실밥이 떠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런 젠장!” “아휴! 머리칼 다 빠지겠다!” “야야! 이거 뭐야!” “반칙!” 밀거적에 걸터앉은 모두가 코를 틀어막고 난리가 났어요. 분명 그 애는 저녁으로 보리밥을 먹고 온 것이 틀림없어요. 잠시 중단되었던 팔씨름은 결국 동생의 승리로 끝났어요. 아버지는 은근히 기뻐하셨죠. 그야 당연하지 않겠어요. 당신의 막내아들이 또래 애를 이겼으니.. 그러나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옆집 그 애의 어머니가 그러셨다는군요. “그 집은 선생 네라 쌀밥과 원기소를 들이 먹여놓고..” 그날 저녁은 수제비를 먹었는데.. “별 하나 꽁꽁 나하나 꽁꽁” 별을 세다 떨어지는 유성에 눈을 돌리고 도깨비와 귀신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죠. 모기를 쫓기 위해 피워 놓았던 검불이 다 타 들어가고 방안의 열기가 식을 쯤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도 끝이 났죠. 저녁으로 먹은 수제비가 금방 꺼져 뱃속이 허전했어요. 그대로 잠을 자려니 배가 “꼬르륵” 거렸지요. 서산 매당지에 걸터앉은 초승달도 하품하며 졸린 눈을 비볐어요. 초저녁 울어대던 소쩍새도 일찌감치 욕골산 잠자리에 들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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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익님의 댓글
수제비라......... 흠... 우리도 오늘 저녁엔 수제비 해 먹자고 해 볼거나? ^*^
윤용혁님의 댓글
광익아, 그간 청안하셨는가? 캐나다의 날씨는 어떤지...수제비를 기억하니 기쁘네.좋은 주말 되시게.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