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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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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월드컵 추억
월드컵 4강의 신화로 온 국민이 신명났던 2002년 그때 우리가족에게도 소중한 월드컵 추억거리가 있어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해 이월 어느 날 군대 간 막내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빠 부탁이 있는데요, 이번 월드컵 행사에 우리부대에서 영어 통역 행사요원을 두 명 선발한다 해서 제가 신청했는데 공부할려구요, 회화 테이프가 있는 영어교재 좀 보내주실래요.”
군대까지 갔으면서도 아직까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막내는 전화가 통하자마자 자기 할 말만 먼저 쏟아내는데 약간은 상기된 음성이다.
아들의 영어실력을 대충은 아는데 아들 녀석이 무슨 뱃장으로 일을 저질렀는지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론 그 뱃장이 마음에 들어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래 자신 있냐?”
“예, 안 돼도 그만이지만 힘껏 해 볼래요.”
“그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즉시 교보문고에 들러 영어회화교재 등 세 권의 책을 사서 소포로 아들에게 보냈다.
뒤에 알고 보니 유학 다녀온 경쟁자들도 있다 하는 선발과정에 아들은 자기도 미국 어학연수 경력이 있다고 뻥을 친 모양이다.
고 일 방학 때 사주동안 학교에서 몇 십 명이 단체로 다녀온 그 연수 수준을 내가 알고 그리고 또 평소 아를의 영어공부 하던 습관도 알기에 내가 예상한 아들의 선발가능성은 솔직히 비관적이었다.
그런데 하여튼 그 아들이 영어 통역요원으로 선발이 됐다.
전주에 있는 육군 부대로 파견되어 행사기간 동안 대전 전주 그리고 광주에서 열리는 월드컵 시합에 동원된다 했다.
“ 아빠, 엄마와 형과 함께 한번 대전으로 월드컵 구경 와요.”
파견지에서 자주 전화하는 아들은 매우 신나는 모양이다. 꼭 한번 온 식구가 대전에서 만나잔다. 대전은 직장관계로 십년정도 살았던 곳으로 두 아들 다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졸업해서 대전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정도 들고 낮 익은 곳이다.
“대전에선요 예선 경기가 몇 있는데요, 대한민국 대표 팀 예선경기는 없거든요. 경기 일정보시고 아무 경기라도 한번 형과 함께 대전 오세요.
그런데 만약 대한민국축구대표팀이 예선에서 조 일위하면 대전에서 하는 16강전에 우리 대한민국 팀이 나가는데요, 그런데 그건 희망사항이지 솔직히 우리 팀이 조 일위 할 수 있겠어요?”
“그래 알았다. 한 번 대전에 가도록 해보자. 몸조심 잘해라.”
다른 부모들은 군대 간 자식을 면회하러 잘들 다닌다는데 그동안 우리 부부 중 누구도 막내가 근무하는 강릉의 공군부대로 한 번도 면회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도 볼 겸 월드컵 경기도 한번 볼 겸 해서 큰아들을 시켜 16강전으로 예정된 6월 18일자 대전경기장의 관람권을 인터넷으로 석장 예매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월드컵 열기는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들의 요원 선발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 틀렸던 것처럼 내 아들의 우리나라 예선전의 예상전적도 빗나가서 그만(?) 대한민국 축구 대표 팀이 예선전 조 일위를 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표 팀의 선전이 계속되면서 전국의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예선전에서 대한민국이 조 일위로 확정되고 나서는 더 열기가 빠르게 달아올라간다.
전날까지 절반정도 남아있던 대전구장의 16강전 관람권이 순식간에 동났으며 관람권의 암표가격은 점점 올라 경기 당일에는 열배 정도 뛰어 백만 원을 호가했다.
하여튼 월드컵 열기도 달아오르면서 아들 덕에 생전 처음 좋은 구경하게 됐다고 집사람과 둘은 즐거워했다.
“여보 우리 이 표 석장 팔고 텔레비전으로 보면 안 될까? 대신 맛있는 거 사먹자. 응?”
“허어, 평생 막내 녀석한테 무슨 원망 들으려고 그런 소릴........ 맘에도 없으면서.”
“여보 우리 대전가는 날 좋은데서 점심 먹자. 작은 놈도 면회하고 나오래서 같이 식사하면 더 좋겠는데.......”
“아줌마야, 꿈도 야무지다. 온 식구가 함께 점심을? 당신 제 정신이야? 당신이 능력껏 해봐. 그리만 되면 나 당신한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 아들이 대전에 휴가 간 거냐? 군대 가봤어 당신이? 밥 먹는 것도 그날은 전쟁일거다.”
등 등........
이런 식의 영양가 없는 대화가 계속됐지만 큰아들도 지방에 있어 단 둘만 있는 집안은 모처럼 월드컵 분위기로 화기가 돌았다.
모이는 곳마다 월드컵 이야기였고 아는 사람마다 온 가족이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구경 가게 된 우리가족을 부러워했다.
드디어 대전에서의 그날이 왔다.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죽전의 집을 떠나 대전서 근처의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과 합류한 후 막내의 숙소인 유성의 국군 휴양소에서 막내아들을 잠시 만나본 후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 경기장에서 이 킬로 정도 거리의 충남대 정문 부근의 주차장에 가까스로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직 오전이었지만 유성부터도 이미 들뜬 분위기다. 오다보니 대전시의 복판을 지나는 갑천변에는 거리응원용 야외스크린이 곳곳에 설치되어있고 적당한 자리마다 새 포장마차들이 줄지어있었다. 그곳은 1993년 대전엑스포 행사기간 때도 별로 인파가 붐비지 않았던 곳인데 벌써 제법 법석댔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 주변은 노원지구 신시가지 개발이 한창인 곳이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했다. 아직 경기장에 입장하려면 몇 시간 기다려야 하는데 여기 저기 사람이 북적된다. 인산인해다.
대목 맞은 식당들 중 한곳을 찾아 어찌어찌 점심식사를 끝냈는데 일본과 터키와의 16강전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는 어느 식당은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거의가 다 붉은 상의 차림인데 나의 평상 노타이차림이 쑥스러운 분위기라 노점상에서 하나 골랐다. 한번 입을 걸 사니마니 비싸니 싸니 집사람과 약간의 다툼도 있었지만 사서입고 입장한 뒤에는 집사람이 그 옷 안 샀으면 미안할 뻔 했다 할 정도로 운동장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경기장 입장전의 두 시간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만으로 글을 써도 몇 장의 글이 모자랄 정도로 경기장 주변은 온통 들 떠있었고 북적거렸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도무지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인다.
이윽고 붉은 악마 응원단이 도착하여 질서 있는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를 압도하며 고조시키는데 드디어 일반 관람객의 입장이 시작 되어 자리를 찾으니 경기장 안에도 이미 열기가 가득하다.
우리가족의 좌석은 본부석 오른편의 골대 뒤쪽이었다.
입장하고 나서도 경기 시작까지는 두 시간정도 남았지만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운동장 여기저기 볼거리도 많았는데 운동장 안에서 막내를 만나니 작은 아들은 신이 나서 안내한다. 사진도 찍고 요기도 하고 하다가 경기시간이 점점 다가와 우리 좌석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에도 틈틈이 행사요원복장을 뽐내며 막내가 우리 좌석 쪽으로 찾아와 이런 저런 신나던 이야기를 던지며 떠들어대다가도 호출이 있으면 즉시 군기가 넘치는 태도로 응답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조금 후 부터는 못 오거든요. 틈나는 대로 핸드폰은 할게요. 경기 끝나면 잠깐 볼 시간 있을 거예요. 그럼 재미있게 구경 하세요. 형 잘 봐.”
막내는 습관대로 자기 할 말만 급히 해대고는 손을 흔든 후 뛰어 사라졌다.
잠시 후 가까운 뒤 좌석에 휠체어 탄 이주일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집사람이 얼른 위로 다녀왔는데 조금 후 돌아온 집사람의 표정이 주위의 분위기와는 동 떨어지게 우울해서져는 훌쩍이며 속삭인다.
“ 여보 이주일씨 산소호흡하면서 휠체어에 앉아있는데 내가 눈인사하면서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여보 왜 그렇게 그 사람 그 눈이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
나는 아무런 말없이 집사람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올라가 볼까 했지만 결국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원로 연예인 이주일의 대전구장의 월드컵 관람모습이 특집으로 방송되었는데 폐암 말기로 투병 중이던 이주일씨는 이후에도 숨을 그칠 때까지 방송을 통하여 여러 번 금연 캠페인에 참여 한 일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 할 것이다.
주위의 들뜬 분위기는 곧 이주일의 일을 잊게 했다.
몸 풀기 위해 앞쪽 이탈리아 골문에서 슛 연습하던 이탈리아 선수의 빗나간 축구공 하나가 우리 쪽으로 빠르게 날라 온다. 앉은 자리에서 그 공을 멋지게 잡아낸 큰아들은 주위의 쏠린 시선을 의식하고는 공을 머리위로 올려 흔들어댄 후 곧장 그 공을 더 멋지게 운동장으로 멀리 차내면서 평소의 축구 실력을 과시한다.
“야 아들아. 나 같으면 그 공 기념품으로 가지겠다. 사진 한 번도 안 찍고 그대로 차 버리냐. 날라 온 복도 차 버리냐?”
“ 아차차, 그러내요 아버지. 다음번엔 안 그럴게요.”
경기시간이 다가올수록 응원의 함성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주변의 관람객들에 비하여 나이 많은 측에 속하는 우리부부도 처음에는 주저주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응원에 빠져버린다. 그런데 응원 따라 하기가 장난이 아니다. 몸이 약한 집사람도 분위기에 따라 응원에 동참한다.
환한 조명아래서 드디어 경기는 시작됐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의 경기내용은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전 16강전 중심으로 편집된 ‘이경규 월드컵에 가다’라는 텔레비전 프로는 그 뒤로도 수년 간 리바이벌 되고 있으나 아직도 볼 때마다 질리지 않는 프로다.
오히려 중간 중간 슬로우 비디오 장면까지 곁들어있어 직접 경기장에서 볼 때 느낄 수 없었던 점을 만족시켜주는 마력도 가지고 있다.
하여튼 다음의 내용들은 다들 알고 있는 순간 들이다.
안정환환 선수의 페널티 킥 실축
너무 일찍 이탈리아에게 빼앗긴 한 점
후반전 거의 마지막 순간 터진 설기현 선수의 동점 골
연장 후반 터진 안정환 선수의 결승 골든 헤딩 골 그리고는 반지세리머니
열광, 열광 환호, 환호.......
사실 한 점을 지고 있는 상태로 후반전이 거의 끝날 무렵부터 나는 자주 전광판의 남은 시간과 하늘에 떠있는 달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이제 몇 분만 지나면 월드컵분위기도 끝나겠구나....... ”
“내일부터는 무슨 낙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
“그래도 16강은 했잖아.”
“그건 그렇고 오늘 밤 저 달은 매우 밝구나. “
아예 이쯤서 마음 접어 비우기로 하고 딴청을 부려본다.
아니 그런데
동점 골이 터졌다.
어떻게 동점골이 터졌는지 내 자리에서는 잘 볼 수도 없었다. 먼 쪽의 골문 근처에서 혼전 중이어서 골인의 순간은 몰랐는데 환호하며 뒤돌아 달려 나오는 태국전사들의 모습과 온 구장이 떠나갈 정도로 터지는 환호에 나도 순간 동점이다 외치며 일어서서 집사람과 아들 손을 번갈아 붙잡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내 머리에 있었던 딴청이 그야말로 부끄러워진다.
더 뜨거워진 대전 구장 응원의 함성소리는 온 천지를 진동시킨다.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분명히 한목소리로 외치는 함성은 비겼다는 것이 아니라 “이겼다”였다.
“ 대-------한 민국, 대-------한 민국, ......... "
운동장의 기세는 이미 이탈리아 선수들의 혼과 사기를 여지없이 밟아댔다.
드디어 골든 골........
난리다. 그야말로 기뻐 날뛰는 난리다. 감격, 감격, 최고의 감격으로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관중들은 관중석에서
대한민국은 그곳에서 하나가 됐다.
경기가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운동장을 메운 관중들은 감격의 여운을 즐기느라 떠날 줄을 몰랐다.
막내는 더욱 바빠졌는지 만나지도 못하고 통화만 하고 세 식구는 운동장을 나섰다.
운동장을 빠져나오니 운동장 밖의 열기는 오히려 더 달아올라있었다. 쏟아져 나와 도로와 인도를 구분 없이 꽉 메운 사람들 중 미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무리 무리로 합장한다.
“ 대-------한 민국, 대-------한 민국 ”
우리 세 식구도 따라서 합창한다.
“대-------한 민국, 대--------한 민국 ”
여기저기서 차량들의 경적도 박자를 맞춘다.
“빵-------빵 빵빵, 빵-------빵 빵빵 ”
30분 거리의 주차장 까지 도착하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는지 유성 거리에 그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본다. 도무지 밤이 깊어도 도무지 식을 것 같지 않은 열광의 분위기.........
자정을 넘겨서야 주차장에서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와 자정이 넘은 시 외곽에 차가 들어서니 그제부터서야 흥분이 가라앉고 대신 피곤이 몰려온다.
유성을 빠져나와 큰 아들 숙소에 도착하는 반시간정도의 사이에 집사람과 아들은 차 안에서 잠에 골아 떨어졌다.
잠에 덜 깬 큰 아들을 숙소 앞에 내려놓고 그대로 집으로 향한다. 적어도 한 시간 반 정도는 더 운전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수원 나들목을 나와 신갈오거리에서 좌회전신호를 받을 때가 거의 새벽 세 시경이었다. 거리는 통상 새벽 때의 그 모습이다. 차량도 인적도 드물었다. 이제 집까지는 십분 거리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죽전 방향으로 들어서던 나는 앞에 나타난 광경을 보고 얼른 옆자리의 집사람을 깨웠다.
“ 여보, 여보 얼른 눈 떠. 저기 봐.”
거기에는 몇 명의 젊은 남녀가 골목길을 일렬로 어깨를 걸쳐잡고 나오며 아무도 없는 새벽거리에서 외치고 있었다.
“대--------한 민국, 대---------한 민국”
한밤토록 환호했었을 그들은 많이 지쳐보였다. 집사람이 한마디 한다.
“어머머 지금까지? 재들 봐. 아직 기운이 남아있네.”
나는 그 의지의 한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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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載峻님의 댓글
감동의 당시를 회상 하며 잘 그리고 감사히 읽었습니다 일과 시작이 늘 5시30분이어 중계 시청을 위해 밤샘은 하지 못 했어도 새벽 운동 후 집에 돌아 오는 즉시 ESPNSports에 경기 결과 시청 열성을 보이던 당시 였습니다 미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거리 집결 응원을 이해 못하더라고요
석광익님의 댓글
그날 저는 출장차 명동 롯데호텔에 머물고 있었어서 그 게임 시청앞에서 응원 했었었습니다. 그때의 감회가 새롭네요.
윤용혁님의 댓글
효철형님의 글을 통해 당시의 열기가 다시 전해옵니다.다 졌다고 판단할 때 설기현이가 동점골을 넣고 연장에서 이영표의 센터링을 골든골로 안정환이 극적인 헤딩슛..정말 감동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