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한구 아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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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이른 아침 “이랴!” 소리를 내며 신작로를 걸어가는 항렬로 형님뻘인 촌부가 뒤뚱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소죽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 암소가 워낭소리를 간간히 내며 주인의 손에 이끌려 읍내 새벽 우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송아지는 엄마소를 따르다 한구 아버이의 허공을 짓는 서툰 몸짓에 잠시 멈춰서더니 “음매!” 울음을 터뜨렸다. 갈바람을 타고 흐르는 영각도 서럽다. 그 사이 감하나가 가지를 놓쳐 땅에 툭하고 떨어졌다. 길섶 바람에 떨어진 노랗게 익은 감을 남이 주울세라 허둥거리던 용대가 눈을 비벼 바라보니 소장수 한구 아버이였다. 작은 키에 머리를 짧게 치고 궐련 담배를 입에 문 폼이 영락없다. 인사성이 바른 용대는 떨어진 감을 줍다말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소 팔라 장에 가시니이까?” 작지만 옹골찬 한구 아버이는 묵묵부답 대꾸가 없다. 어린 용대는 속으로 “제기랄!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소장수로 돈푼께나 만진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웃동네의 소들을 가져다 흥정해 잘도 팔아주고... 얼마 전에는 소 판 돈을 화투판에서 몽땅 날리기도 했단다. 어린 용대는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소장수 그 분과 이름이 비슷해 어느새 별명이 한구아버이가 된 것이다. 분명 이름의 끝 자 하나가 다른데도 불렀을 때 발음이 같아... 어린 애가 벌써 애 아버지가 되었다니 그 별명을 좋아 할 리가 없었다. 특히 짓궂은 동생이 말다툼하다 한구아버이하며 놀려댈 때면... 애늙은이가 된 것 같아 너무나 싫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동생이 용대보고 “한구아버이!”하고 놀리다 때마침 지나가던 진짜 한구아버이한테 걸려 동생은 혼쭐이 나고야 말았다. 그 집의 아들들은 대부분 착한데 셋째 아들만큼은 유난히 까칠하였다. 용대네 부모님이 인천 작은 외삼촌댁에 가셔서 밤에 애들만 자기가 좀 그러해 사촌형님이 와 대신 자 줄 때 이웃집 누나들이 놀러와 재미있게 노는 것이 샘나 담 밖에서 돌을 던지며 시비를 걸어왔다. 결국 참다못한 사촌형님과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사촌형님의 뚝 힘에 밀린 그 집 셋째아들이 갑자기 옆에 덩그러니 놓인 무딘 조선낫을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망나니인양... 어린 용대는 너무나 놀랐다. 그 보다도 맘대로 하라며 목을 내미는 사촌형님의 배포에 더욱...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골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그간 깡통을 잘라 만든 등잔에 석유를 이용해 두 개의 심지에 불을 붙여 아침이면 너나할 것 없이 콧구멍이 새까매지는 원시적 불 밝힘 시대는 가고 광명의 시대가 찾아든 것이다. 이제 과년한 처녀총각의 한 여름 풋사랑인 보리밭 짝짜꿍도 도깨비와 귀신 이야기도 사라질 것이다. 산골 집들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 보꾹에는 두꺼비집이 모두 달리고 전에는 꿈에도 상상 못할 브라운관 TV가 큰아버지 댁에 들어와 공부하라는 어머니의 성화도 귓전에 흘린 채 연속극 여로와 임꺽정의 다음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마음 졸이며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어머니 몰래 동생과 담장을 넘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용대 네도 모처럼 텔레비전을 샀는데 큰 산이 가려 수신 상태가 너무나 안 좋았다. 화면은 늘 찌그러지고 소리만 듣고 있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두드려 보기도 하고 아무리 흔들어도...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마시며 매달린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신통치가 않았다. 매일 안테나와의 씨름이었다. 그런데 한구아버이 네는 잘 나온다고 그 집 큰아들 한구가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다. 용내천을 낀 협곡이라 그런지... 할 수 없이 긴 줄을 사 그 집 옆에 안테나를 세웠더니 정말 잘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구의 횡포로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야! 용대야! 너 네 안테나 안 치우면 부러뜨릴 거야!” 아무리 용대보다 나이가 많기로서니 아제보고 야라니... 용대 네가 안테나를 세운 뒤로는 자기네도 잘 안 나온다는 것이다. 전파를 반 뺏어가서...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의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무식이 춤을 췄고 모르면 이리도 용감한 것인가? 결국 철수해 용대네 텔레비전은 라디오로 전락한지 오래다. 용대 네가 사는 집은 욕골 지대가 높고 산이 가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용대는 한구아버이 네가 무진장 부러웠다. 그 집은 애들도 많이 낳아 거의 축구팀을 결성할 정도였고 자기들끼리 잘도 놀았다. 그런데 어느 해 물을 가둬둔 조그만 저수지 용판구덩이의 둑이 터져 물난리가 났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 집 텃밭과 마당 앞 논을 싹 쓸어갔다. 순식간에... 그 후론 용대는 그 집을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개울가보다는 산이 가려도 지대가 높은 용대네 집이 제일 좋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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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철님의 댓글
용혁후배.......한구아버지 집이 아마 용팡구덩이 아랫쪽 갯가일 거란 것만 추측되는데 살무니에 전기 들어왔다면 70년 중후반 이야기일거군요. 옛 고향 떠올리게하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윤용혁님의 댓글
효철형님의 인고홈피입성을 온누리에 알려 팡파레를 울리며 버선발로 달려가 반기는 저랍니다.맞습니다.용팡구덩이 잘 아시죠? 전기를 일으키려다 망한...가명이지만 아실거예요.전기는 살무니에 정확히 1972 년도 가을에 들어왔어요.동네가 확 달리지더군요.환한 그 빛은 정말 놀라웠지요.여여하세요.